히소카는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 별로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히소카는 속박되지도 않는다. 자신 외의 누군가에게 속박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영향을 받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 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이었다. 히소카가 일레이나를 죽인 것은.
일레이나, 히소카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여느 때와 달리 히소카는 그녀의 이름을 쉬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운 존재였다. ‘열매’ 로서 키울 가치가 있었다. 아름답고 강한 것은 오랫동안 즐기다가 과즙을 쥐어 짜내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간간히 떠올리는 건, 제대로 익지 않았을 때 수확해버렸다는 아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히소카는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일레이나♣”
내가 너를 찾아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욕을 퍼붓는 일레이나에게 히소카가 말했다. 마지막. 마지막이었다. 일레이나를 이제 수확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보다 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제 질렸어. 손안의 트럼프 카드를 굴리며, 히소카는 일레이나가 까드득 이를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납게 치켜 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눈빛도, 내일이면 끝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히소카는 일레이나가 제게 내지르는 주먹을 한 손으로 막아냈다.
“역시 그 때보다 성장했네♥”
“닥쳐, 시발새끼야!!!”
넨으로 가드했지만, 살짝 얼얼한 감각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히소카가 말했다. 환영여단의 완력 1위라 불리는 우보긴과 맞먹는 파워였다. 역시 강화계다운 파워였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건 파워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단조로운 공격만 나오게 만들었다. 길거리에 널려있는 여느 넨 능력자와 다를바 없는 움직임은 히소카의 기분을 천천히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가 그려왔던 전투가 아니었다. 그가 일레이나의 숨을 거두는 순간은 이렇게 빛바랜 흑백 사진이 되어선 안되었다. 좀 더, 찬란해야했다. 좀 더.
“일레이나, 기대 이하야♣”
어쩜 이렇게 형편없게 나올 수 있지? 히소카가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일레이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형편없다고? 웃기지 마라. 네가 나를 그렇게 평가내리는 것이 나는 처음부터 싫었어. 사람을 멋대로 열매라는 둥의 소리를 하며, 키우겠다는 둥, 목숨을 살려주는 거라는 둥의 소리를 하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녀는 히소카가 정말 싫었다. 그가 하는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자신도 싫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랬지? 정말 그 말이 나는 기쁘다고, 히소카!!!”
너의 개같은 얼굴을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마지막은. 일레이나는 이를 까득 갈며, 히소카가 제 몸에 붙이려드는 번지껌을 교로 파악하며, 피해냈다. 뒤로 등을 훅 젖혀가며 피해버리는 일레이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히소카는 씩 웃었다.
“조심해♥”
피해냈다고 생각한 히소카의 번지껌이 그녀를 지나쳐, 뒷 편에 있던 나무에 들러붙어서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되돌아오고 있었다. 껌과 고무의 성질을 가진 번지껌이 나무에 들러붙어서 탄력을 가지고 되돌아오고 있었다. 칫, 혀를 차며 일레이나는 지탱하고 있던 다리를 들어서 일부러 자신의 자세를 무너트리는 것과 동시에 히소카가 제게 가져오는 나무를 걷어차 부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는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을 뚫고 히소카가 일레이나의 다리를 덥썩 잡았다. 발목을 붙잡은 손을 보고 그녀는 허벅지를 비롯한 다리 근육을 움직여 히소카가 붙잡은 다리를 움직여 히소카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얻어맞은 히소카가 뒤로 수미터 밀려났고, 그 사이 일레이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손해를 봤잖아.”
자신의 발목에 히소카의 넨이 들러붙은 것을 본 일레이나가 낭패라는 얼굴로 중얼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로 밀려났던 히소카가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가벼운 손짓은 일레이나의 몸을 나무처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히소카에게 끌려가게 생긴 일레이나는 몇 초 버티는가 싶더니, 생각을 전환해 도리어 히소카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달려드는 일레이나를 보며 히소카는 카드를 날렸다. 넨을 담은 카드와 텐으로 몸을 보호 하고 있는 일레이나의 넨. 히소카의 카드는 달려드는 일레이나의 옷자락을 자르는 것에 그쳤다. 정면으로 달려든 일레이나는 히소카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묵직한 소리가 일대에 울려퍼졌다. 그녀가 히소카의 복부를 치는 순간, 동시에 히소카는 그녀의 옷을 찢고 날아갔던 카드에 붙여두었던 번지껌을 움직여, 카드가 다시 돌아와 그녀의 등에 꽂히도록 했다.
내장까지 파고든 충격파에 히소카가 울컥 차오르는 피를 삼키는 동안, 일레이나는 등에 꽂힌 카드가 주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옷자락을 찢기만 했다해서, 무시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방심했다. 일레이나는 등에 꽂힌 카드를 당장 스스로 뽑을 수도 없으니,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당장 취할 수 있는 방안은 눈 앞에서 자신을 그간 괴롭혀온 히소카를 찢어발기는 일이었다.
“좋은 살기야♥”
히소카가 기억하는 일레이나의 모습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날린 트럼프 카드를 등에 꽂은 채, 달려드는 불나방. 히소카는 눈을 감았다. 망막에 아로 새겨진 그녀는 결국 히소카에게 목이 베여 죽었다. 그녀에게 최후를 선고했던 건, 스페이드 카드였던가, 클로버였던가? 어떤 것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표정만은 아직 선명했다. 죽는 순간, 그녀는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히소카를 향한 악의를 가득 담고 웃었다.
드디어, 너와는 작별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죽었다.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목이 베여 죽은 일레이나. 그 시체를 어떻게 했더라? 히소카는 다시 흐린 안개에 잠길 것 같은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피 칠갑이 된 시체는 들개를 비롯한 들짐승들을 불러들였다. 핏내음에 이끌려 온 동물들은 히소카가 떠나는 순간, 일레이나의 시체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눈 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을 외면할 짐승은 없었다. 순식간에 뜯어 먹히는 모습을 히소카는 덤덤히 바라보았다. 생전 아름다웠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신이 공을 들여 키워낸 열매는 비릿한 육괴덩어리가 되었고, 그건 애먼 짐승들의 배를 불렸다. 히소카는 그걸 바라보다가 떠났고, 일레이나는 그렇게 죽었다.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 시신을 수습할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곤이 화를 내어 덤벼들었던 것은 최고였지♣. 곤이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달려드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런 점을 생각하면 일레이나를 조금 더 살려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며 히소카는 중얼였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이었다. 그는 일레이나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미 거둔 열매는 거둔 열매였고, 더는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히소카는 일레이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일레이나를. 자신의 손으로 그 목숨을 거둔 일레이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왜? 스스로도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얼굴은 흐릿해져갈지언정, 그 이름과 제게 퍼부었던 말들은 선명해져만 갔다. 일레이나가 뱉었던 말들은 과거엔 덧없이 흘러간 강물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거대한 늪이었다. 히소카의 발목을 진득진득하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이미 죽은 것에 대해 분노한다 한들, 달라질 것도 없는 노릇이라. 히소카는 일레이나가 떠오를 때면 뱃속 저 아래부터 찾아오는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카드를 집어 들어 사람을 죽이곤 했다. 일레이나의 숨을 거뒀던 것과 똑같이 카드로 목을 베어냈다. 발치에 비슷한 인간 머리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일레이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곤 했다. 생전에는 히소카가 일레이나를 귀찮게 했자면, 이제는 죽은 일레이나가 히소카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 귀찮음을 히소카는 어느새 자신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문득 문득 떠오르는 말들을 가끔은 제 입으로 내뱉는 일도 하곤 했다. 그녀가 생전 했던 말을 흉내내면, 평정심을 잃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자극할 수 있어서 내뱉는 정도였다. 히소카가 일레이나의 말을 흉내내는 것은.
“닮았어.”
“그럴 리 가 없어♣”
히소카는 이르미의 평가를 전면 부정했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였다. 닮는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비슷해보인다는 이야기였다. 히소카는 일부러 생각나는 일레이나의 말을 비슷하게 뱉어내 상대를 자극하는 용으로 쓰고 있었다. 그건 닮은 것이 아니었다.
“재미난 흉내놀이일 뿐이야, 이르미♠”
“글세.”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히소카. 재차 일레이나와 닮아졌다는 이르미의 말을 히소카는 부정했다. 이번은 이르미가 틀렸다. 뭐, 이르미는 서투니까 이해할 수 있어♣. 조르딕 가(家)의 장남은 인간관계에 있어 어긋난 자였고, 간간히 핀트가 나간 말을 많이 하곤 했다. 이르미를 꽤 오랫동안 파트너로서 알고온 히소카는 그 모습을 많이 경험해왔고, 이번에 이르미가 내뱉는 평가도 그러한 일환으로 간주했다. 그는 일레이나를 닮지 않았다. 닮는다는 건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슷해지는 것이다. 히소카는 그렇지 않았다.
“닮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닮은 거 아냐?”
너 말이야. 꽤 그 여자랑 비슷하니까. 이르미에 이어 마치까지 히소카에게 말했다. 죽은 일레이나와 히소카가 비슷해보인다고. 이쯤 되자, 히소카는 꾹꾹 눌러온 불쾌감이, 스치듯 무시했던 발치의 작은 늪이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 삼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늪은.
그를 삼킨채 가두고 있었다. 그 안에 갇혀있었기에 히소카는 알지 못했다. 이미 들어와버려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너와 내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거야.”
그렇기에 나는 기뻐.
환하게 웃으며 죽었던 악의에 가득 찼던 얼굴이 어느새 그의 우선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견딜 수 없어 죽였지만, 죽인 것이 더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