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워킹데드 시즌 5 8화의 직접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내 사랑, 당신을 어쩌면 좋지. 두려운 나는 슬퍼하는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하지. 울고 있는 나는 겁 먹은 당신을 어떻게 껴안아야 하는걸까. 부디 말해줘, 내 사랑. 침묵에 잠겨 나를 외면하려 하는 당신에게 비참으로 병든 나는 어떻게 입을 맞춰야 할까.
2.
차 안은 조용했다. 윤은 비어있을 것이 분명한 CD를 쥔 손 안에 힘을 주는 글렌을 향해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햇빛이 검은 고무를 댄 창틀 위에 반짝이며 고였다가 금세 스며들었다. 그레디 메모리얼 병원을 지난 이후로 일행의 모두는 침묵 속으로 잠겼다. 동료와 가족끼리 공유하는 부드러운 침묵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비통과 고난을 삼키기 위해 만들어낸 무덤 같은 침묵을 향해서. 창밖으로 갈색으로 말라붙은 풀들이 햇빛을 이고 옅은 금색으로 반짝거렸다. 옅은 금색. 윤은 윗옷을 걸친 제 팔을 습관적으로 쓸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단단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졌던 소녀가 시선 끝에서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맑게 웃는 얼굴에 입 안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름이 걸렸다. 베스. 소리 없는 속삭임에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였다, 고. 송 윤-윤 딕슨에게 있어 베스 그린을 정의하라면 아마 그 단어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베스는 그녀의 여동생보다 고작해야 두어 살이 많았다. 그래서 윤은 베스를 볼 때마다, 제 뒤에 쫑쫑 따라붙어 언니, 언니하고 옷자락을 잡아당기던 여동생을 떠올리고는 했다.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녀가 영영 미워할 수 없었던 아이. 그녀를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 속으로 빠뜨렸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면서도 그녀가 가장 아꼈던 존재. 베스 역시도 그랬다. 매기의 여동생이면서 그녀의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를 윤은 도저히 멀리하거나 타인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존재에 추억까지 덧씌워지는 그 순간 인간은 애틋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므로. 해서 그녀는 베스가 다시 돌아와주길 바랐다. 베스가 다시 돌아와서, 그 나이를 벗어난 것 같은 현명한 눈동자로 그녀를 다시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녀가 없을 때에 대릴을 붙잡아 준 소녀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타이리스와 소년-베스와 함께 그레디 메모리얼 병원에 있었다던 노아라는 소년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윤은 마른세수를 하듯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글렌이 잠깐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구부리던 CD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베스의 죽음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저, 그녀가 그 어떤 말을 건네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없도록 떠나버린 베스를 마주했을 뿐이다. 그 죽음을 목격한 것은 대릴이었다. 제대로 체온이 식지도 못해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베스를 안고 온 그녀의 남편. 그건 순간이었다고 했다. 정말로 순간, 그냥 눈을 한 번 깜박이는 그 순간에 일이 틀어졌고 베스는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한순간 상황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대릴은 베스를 쏜 여자의 머리를 날렸고, 시체는 둘이 되었다고 했다. 속이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윤은 다시 한 번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 일이었다. 베스는 돌아올 수 있었다. 돈인지 던인지 하는, 그 병원의 총책임자였다는 그 여자만 아니었으면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총만 없었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그 여자만 죽었더라면. 그녀는 희망에서 절망으로 갑작스럽게 처박힌 매기가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소리와 그 안으로 척척하게 젖어들던 물기를 기억했다. 글렌마저도 그 순간의 매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베스를 안고 온 대릴에게 그녀 역시.
나 역시도. 목 안쪽에서부터 쓴물이 밀려왔다. 멀미를 하는 것 같이 눈앞이 어찔거렸다가 간신히 돌아왔다. 그녀는 대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베스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로 대릴은 다른 이들보다 배로 무거울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침묵은 늘 곧 폭발하기 직전의 무언가들을 앙금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묵직하게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좀 달랐다. 그것은 독약처럼 쓰고 눈물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를 끝없이 상실감과 비참함에 시달리게 했다. 그는 마치, 허셜의 농장에서 소피아를 잃었던 그 때처럼 무언가에 대해서 크게 어긋남을 느낀 것 같았다. 희망이 상실로 변하고 기대가 비통으로 변하는 순간의 그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어떤 것에 대해서든지 간에, 무엇이든지 간에, 그가 그 전까지 바라봤던 어떤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 쳐서 그 가장자리를 맴돌던 그 시절로 돌아가려고 했다.
‘릭이 있는 쪽으로 가.’
손을 뻗었던 그녀에게 한 걸음 물러섰던 대릴의 눈은 꼭 그 때처럼 우묵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마을로 들어갈 테니까 사람이 더 필요할 거야.’
그 시선은 윤에게 닿지 않았다.
햇살이 눈시울을 아프게 물들였다.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비통으로 가득하고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아저씨, 나는 어떻게……. 입 안으로 소리를 깨물어 삼키며 윤은 까만 고무 창틀 아래 고이는 햇살의 발자욱을 따라 시선을 미끄러뜨렸다가 그대로 깜박, 깜박, 눈꺼풀 아래에 빛무리를 가뒀다. 마른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으니 남겨두었다가 눈물 대신이라도 떨어지면 좋을 것이다. 끓어올라 터지려는 침묵과 깊게 응어리져 구덩이를 패는 침묵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모방하고 가면을 써서 어릿광대짓을 자주 했다고 한들 그녀가 건져낼 수 있는 것들은 한계가 있었다. 대릴, 우리는. 타이어가 부드럽게 길 위에 멈춰서면서 몸이 살그머니 기우뚱거렸다. 글렌의 손 안에서 이제는 제 기능도 무엇도 상실했을 둥근 플라스틱 원반이 낮고 날선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윤은 뺨 안쪽 미끄덩하게 고이는 살점을 우두둑 씹었다. 혀 끝에 비리고 찝찔한 피 맛이 풍겼다. 상념에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아,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죽음 속에서 유영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숲에 깔린 나뭇잎들 사이로 빛이 얼룩덜룩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답해주지 않았다.
3.
모래성이 집채만 한 파도에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본 어린 애가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 고. 대릴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교도소가 불타고, 베스를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그러니까 그의 어린 아내를 되찾고 릭과 재회하기 전까지 느꼈던 그 질척거리고 텅 빈 것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뒤덮어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게 공포였는지 슬픔이었는지도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단 하나, 그가 그 감정들에서 짚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력함이었다. 죄책감과 허무함을 포함한 무력함. 그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대는 것들은 모조리 무너지고 망가졌다. 당신은 나를 아주 그리워할거에요, 미스터 딕슨. 그렇게 말하던 옅은 금발의 소녀와, 그리고.
그리고
캐럴은 그와 함께 차를 탄 이후로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그가 윤이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자국을 물러서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랬다. 그건 윤과 그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오래도록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끝내는 불타오르고 말았던 허셜의 농장에서의 일들 이래로 그는 윤이 뻗어오는 손길과 끌어안는 품을 피한 적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그가 살아있고 싶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제 뺨에 닿는 작은 손의 온기를 느낄 때마다, 그리고 품에 끌어안은 흰 목덜미에서 미약하게 뛰는 맥박이 입술 위로 번질 때마다 그는 삶을 갈망했다. 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좀 더 많이, 더 많은 시간 속에서 함께하고 싶었다. 윤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 사이를 겉돌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바 없는 뜨내기 잡배가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교도소가 무너지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 이상 떠돌이 대릴 딕슨은, 사람을 피하고 형의 뒤를 쫓던 대릴 딕슨은 없을 것이라고.
목구멍 안에서 매캐하게 담배가 당겼다. 그러나 대릴은 필터를 씹고 불을 붙이는 대신 아랫입술의 안쪽, 앞니 사이로 물면 우둘투둘한 소리가 올라오는 살점을 깨물었다. 그가 만들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내렸다. 교도소의 잿가루는 그의 폐 안 쪽에 절망으로 눌어붙었고 어린 아내를 잃었다는 절망과 허셜 영감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는 죄책감으로 벽에 튀어나온 못대가리처럼 굴던 그의 손을 잡아 늪 바깥으로 끌어낸 소녀는 그의 눈앞에서 죽었다. 단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저 한 방의 총성, 쓰러지던 창백한 어깨와 달빛 아래서는 은색으로도 반짝이던 금발을 어지럽게 더럽히던 핏물이 그가 만들었던,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에 종언을 고했다.
베스는 그에게 있어 하나의 이정표나 등대에 가까웠다. 나이에 맞지 않도록 현명한 소녀는 목이 잠기기 직전의 그를 끌어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 번 길 위에 설 수 있게 해주었다. 윤이 손을 잡아주었다면 소녀는 등을 떠밀어주었다. 오래도록 그를 집어삼키고, 윤을 잃었다고 생각한 그 시간 이후로 다시 발목까지 차오르던 과거에서 그를 건져내 준 길잡이. 대릴은 베스가 그들에게로 되돌아오길 바랐다. 현명하고 다정한, 올곧은 소녀가 언니와 재회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베스 그린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 무엇도 지킬 수 없었다.
-hey, 캐럴.
무전기에서 릭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캐럴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짤막하게 들려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릭이 있는 차에 타고 있을 윤을 생각했다. 허리까지 닿도록 길어진 머리카락은 급하게 잘라내느라 비뚤어지고 젖살이 올라 부드러웠던 얼굴선이 창백하게 가라앉아, 처연하고 외로운 얼굴을 한 채 그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어린 아내. 그가 한 발자국을 물러섰을 때 그의 계집애는 꼭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물결이 지는 눈동자가 햇살을 테두리에 둘러 희미한 금빛 아지랑이를 띤 채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 마른 어깨를 끌어안아 오래도록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면 언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음에 빼앗기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무너지고 불길이 치솟아 오른 교도소였다. 피웅덩이에 머리카락을 적시며 누워있던 어린 소녀였다. 그가 무너뜨린 것들. 그가 지킬 수 없었던 것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목구멍 아래 먹먹하게 치솟은 말들이 날카롭게 혀 아래를 난도질했다.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무엇보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윤은 그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분수에 맞지 않도록 반짝이는 것이었다. 매기의 흐느낌이 깔린 6피트의 구덩이에 베스를 묻으며 그는 그 창백한 얼굴 위로 몇 번이나 겹쳐졌다 사라지는 윤을 보았다. 그가 사랑하는 어린 아내, 언제나 봄볕처럼 웃는 찬란한 사랑. 옅은 금발을 구불거리며 제 아버지만큼이나 현명한 눈동자를 반짝이던 어린 소녀는 그의 젖은 시선 속에서 엉망으로 잘려나간 머리카락에 겁이 날 정도로 마른 어깨를 가진 젊은 여자가 되었다. 그는 그 환상 속에서 겁에 질렸고, 죄책감을 느꼈고, 결국 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그리고 제 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인정했다. 저를 사랑해준 이들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약해빠진 존재임을 인정했다. 그러자 도저히 그 곁으로 갈 수가 없었다. 윤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그의 가족들, 동료들, 그 누구에게도.
“대릴.”
그는 아무런 말없이 저를 부른 캐럴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침착하면서도 감각을 한껏 곤두세운 듯 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릭은 20분 정도 시간이 필요하대, 하고 말하곤 다시 앞 쪽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입술을 말아 물고 잠깐 침묵을 지키다 그래, 하고 대답했다. 햇빛이 차의 앞유리 모서리에 맺혀 옅게 흩뿌려졌다. 눈이 부신 것인지 시큰거리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이 눈가 끝으로 열기가 확 번졌다. 그는 무너진 것들을 생각했다. 그가 사랑한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또다시 그가 망가뜨리게 될 것들. 아저씨. 울음을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목소리가 귓가에 흩어졌다. 혀 끝으로 소리내지 못한 대답들이 터뜨리지 못한 울부짖음의 파편이 되어 딱딱하게 엉겨붙었다. 한 걸음 물러선 그를 향해 다급하게 딛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울음처럼 쏟아지던 부름이.
‘대릴.’
꼬마야, 나는.
내가 널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석궁을 매만졌다.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목울대 안쪽으로 끝없이 역류해 내장을 긁어댔다. 핏물같은 쇠냄새가 났다.
4.
Tell me is this where I give it all up
내가 여기서 모든 걸 포기해야하는 건지 말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