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죽음과 아주 머나먼 불사의 존재인 밀레시안.
몇번을 죽어도 환생하고
몇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미 알고 있다.
비명과 괴수들의 우렁찬 괴성이 하늘 높이 울려퍼지고 몰려오는 괴수들 앞에서 모두가 하나 하나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미 물리고 가격당해 처참한 모습의 영웅은, 그를 신이라 칭송하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그 무모한 짓을 강행하며 대검 한 자루에 기대어 버티며 홀로 전장을 지키고 있었다.
" 밀레시안 님이... 밀리고 있어...? "
" 아냐, 그럴리 없어! 밀레시안 님은 우릴 구해주실꺼야! "
남은 희망을 내걸고 영웅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병사들.
죽어가는 영혼들이 하나하나 늘어날수록 그의 어께는 날로 무거워져 넘을수 없는 벽에 자해하듯 계속해서 전진한다.
이미 망가진 그의 육신으로 무거운 대검을 들어 돌진한 적진은, 그의 검으로도 아무런 흠집조차 낼수 없어서.
사나운 맹수들에게 물어 뜯길 뿐이었다.
더이상 막을수 없구나.
비록 이런 작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보려했지만 이런 목숨으로도 구할수 없구나.
이미 모든 것을 단념하듯 괴수에게 하나 하나 몸이 물려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서서히 죽음을 받아들이려 할때였다.
" 저지먼트 블레이드!! "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대검이 괴수를 날려버리고 굉음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거대한 대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곳에 너무나 이상할 만큼 반가운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쪽은, 그리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가만히 있으라니까 왜 또 움직여!!! "
" 아, 아벨린 님..! 시즈 님도 분명 사정이 있으셔서...! "
" 한번 당했으면 됐지. 또 무슨 꼴을 당하려고!!! "
...아, 아벨린......?
처음으로 당한 호된 호통.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자 그대로 달려온 분홍 머리의 여기사에게 멱살을 잡히듯 붙잡혔다.
그 누구도 나에게 소리친 적도 이런식으로 다그친 적도 없었기에 그저 아무말도 못하고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며 당황해하고 있을 참이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다그치며 나를 부축하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호되게 혼나기 시작했다.
" 왜 도와주겠다는데도 사지로 걸어들어가!!! 지금은 예전의 그 당신이 아니라고!! "
" 아, 아벨린 님! 지금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많아요..! "
갈색머리의 청년의 말에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돌린 그녀들은 자신의 말로 인해 싸울 의지를 상실하고 주저앉기 시작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하나 둘씩 더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아버린 병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
다시 살아날수 없다.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더더욱 가만히 있을수 없어 다시 검을 빼들었을 때, 나를 제지하며 아벨린이 말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심했어요 시즈. ....일단 후퇴해요. 당신은 더이상 싸울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
....그치만.... 그치만 그렇다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하구요...?
" .....괜찮습니다. 당신이 시간을 벌어준 덕에 다른 곳에 파견 나갔던 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이만 휴식을 취해도 괜찮아요. "
나의 말에 미소를 머금은 그 입술은 나를 달래듯 낮고 잔잔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켜주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슬픔을 가득 담은 바다같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녀의 어께에 기대어 찬찬히 코리브 계곡으로 이동하였다.
-" 시...... 시.... 즈..... !! "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목소리.
시야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그저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멀리 보이는 공동 묘지와 전투의 흔적들.
땅이 파이고 피가 튀어 더럽혀진 그곳에서 시선이 벗어나 찬찬히 주변을 둘러 보았을 땐,
" 시즈..! 시즈! 정신이 드나요? "
" 시즈 님! 다행이다... "
.....
" 죄송합니다. 시즈..... 제게 아직 의심이 남아있었던가 봅니다.... 그 탓에 당신이 이렇게.... "
........아.....
분홍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머릿결, 그 누구라도 얼굴을 본다면 아름답다라는 말을 꺼낼법한 여기사와,
주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듯한 여린 강아지 같은 갈색 머리의 청년.
그 두사람을 알아보고 시야가 또렷해지던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기억...
그들에게서 전수받은 신성 마법을 펼쳤을때 갑작스럽게 튕겨져나가버린 아벨린을 발견하곤 그녀를 대신 감싸 거대한 사도의 스태프를 막아내었다.
물론 그 충격은 말로 형용할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웠고 그야말로 죽음의 문턱까지 직결될 정도의 힘이었다.
그 뒤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녀를 지키고자 한 나의 마음에 폭주해버린 힘들로 어떻게든 사도를 처리했다는 것 외엔.
갑작스럽게 몰려온 고통에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몸상태를 확인하였다.
.....크윽..!?
" 아, 안돼요! 움직이시면 안돼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단 말이에요..! "
.....상처를 치료 중인가..
" 네, 맞아요... 그러니까 움직이지 말아요.. "
....됐습니다. 그냥 죽이세요.
" ...뭐라구요? "
사색이 되어버린 얼굴빛, 상처를 치려하던 손이 멈추고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다시 들려달라는 듯.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에 목구멍부터 솟아오르던 피를 다시 겨우 삼키고 말을 꺼낸다.
.....왼쪽 쇄골..... 갈비뼈 서너개 정도 골절에........... 이미 왼손은 쓸수 없을것 같고..... 쿨럭... 아마.... 이 느낌대로라면.... 치료해봤자 오히려 완치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만 같군요....
" 아, 아무리 그래도 죽이라는 소리는... "
.....미안해요 아벨린. ......괜찮아요 다들 알잖아요. 난 죽지 않아요. 금방 환생 해서 돌아올테니....
점차 또다시 흐려지는 시선에 힘겹게 그들에게 말을 꺼내었다. 계속해서 몰려오는 몸 이곳저곳에서 울려퍼지는 고통들에 더이상 말을 이을수도 없이 그저 말없이 멍하니 신음을 참아낼때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분홍머리의 기사는 치료하는 것을 멈추고 일어나 자신의 랜스를 들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그 랜스의 끝은 나의 심장을 향해 있었고, 앙 다문 그녀의 입술과 결심에 찬 그 눈빛엔 왠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었다.
분명 그녀에게 지독한 짓을 하게 된것이겠지. 하지만 상관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이런 종잇조각 같은 가벼운 목숨은 그녀를 위해선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타라 왕성에서의 마지막 결전이 끝이 났다.
나에게 어둠의 갑옷을 건내주었던 블랙 위저드가 보여준 결말은 그야말로 처참하였다.
광신도의 몸을 제물 삼아 그곳에 강림한 두 마리의 완전체 사도는 우여곡절 끝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물론 그 마지막 결전의 끝에 남은 것은 또다시 피떡이 되어 쓰러진 나뿐이었지만.
.......후아.....
모든 게 끝이 났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서 내뱉은 한숨은 정말 깊고 깊어서 그야말로 땅이 꺼질 것만 같은 한숨이었다.
잠시후 다급한 발걸음 소리에 고개만 겨우 돌려보자 일전의 두 사건처럼 화가 난것 같기도 하고 울것 같기도 한 얼굴이 된체 달려온 아벨린을 발견할수 있었다.
아, 또 온다면 화내려나.
왠지모를 불안감에 그녀를 맞이하자 그녀는 생각과는 다르게 쓰러진 나를 붙잡고 억지로 애써 눈물을 참는듯 고개를 떨구고 나에게 말했다.
" .....무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거에요.... 도망가더라도 우리 기사단이 있는데.... "
........당신이 전에 나에게 사과했던 것 처럼.... 불사의 삶에 취해서 영웅놀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에요.
" .......이번엔 안 죽일꺼에요...... 제대로 치료받고 나으세요..... "
.....하하..... 나 많이 아픈데..... 그냥 죽여주면 안될까요...?
" ...아프세요... 벌이에요.. 알터...! "
" 크흡... 네, 네...! "
" 이 사람... 절때 죽이지 말아요..!! 알았죠..! 조장으로써의 명령이에요 이건! "
" 아, 네..!? 그치만 아벨린 님...! "
" 하하.. 아벨린. 당신도 참 변하지 않는군요. "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 속에 이미 울고 있는 알터를 바라보지만 자기 자신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아무것도 못해주는 것에 대하여 미안한지 더욱 큰 눈물방울을 흘리는 그를 피식 웃어주고서 억지로 눈물을 참는 그녀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꺼내었다.
.......얌전히 낫겠습니다.
-푸른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 수풀.
일반인들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그 깊은 곳을 넘어 아주 오래 전부터 자리잡아있던 건물이 있다.
그 곳을 조금 넘어가 역대 조장들의 무덤.
아마 죽지 않는 나는 이곳에 묻어질 일은 없겠지.
비석에 쓰여진 글자를 하나 둘 읽으며 거슬러 올라가 어떤 비석 앞에 멈춘다.
.......오랜만이로군요.
비석 앞에 바로서 고개를 숙여 묘지를 바라본다.
한참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힘겹게 입을 연다.
.......당신 말대로 요즘은 무리하지 않고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엔... 에레원의 손녀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제 할머니를 닮아 막무가내에 솔직하지 못한 아이더군요.
기사단 내부에서도 속속 들어 좋은 인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묘지 앞에 무릎을 꿇고서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무리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와 다함께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날 보고 과연 어떻게 말해줄까요..? 다행이라고 말해줄까요..? 아니면,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까요..?
점점 격양되는 감정에 결국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산산조각 난다.
언젠가. 우리의 적이었던 한 서큐버스가 그런 말을 하였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영원히 가두어버리겠다고.
지금 생각해본다면 그놈들은 참으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아 이 세계를 떠나지도 못하고, 그녀를 따라가고 싶어 이 세계를 떠난다면 그녀를 잊어버리니.
이곳 에린이야 말로 이미 완벽한 감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