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가냘픈 고동이 느껴진다. 피 밑을 가르고 헤집어야 만질 수 있는 가장 연약하고 귀중한 곳, 살짝 짓누르자 억눌린 두근거림이 소리를 키웠다. 끈적끈적한 점액 속에 들어있는 듯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손 안으로 가득 느껴지는 것을 느긋하게 인지하며, 그는 손바닥에 닿는 심장을 그대로 쥐어 터트렸다.
퍽.
매그너스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와 그녀의 관계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가 이렇게까지 비이상적인 살해 충동에 휘감겨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는 점 정도는 명백하기 그지없는 일이었고,
그래, 누구라도 그 정도로 미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리 폭군이라는 이명을 가진 남자라 할지어도, 그토록 광폭하고 난잡하고 음습한 사내라 하여도, 그럼에도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여기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가, 그를, 이렇게까지 치명적으로 망가트린 것이다.
그 여자. 천진하리만치 투명하게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까만 색의 해파리 같은 머리카락. 우유처럼 새뽀얀 피부는 한 입 베어물면 녹아내릴 것만 같이 순결하고 그 성자와도 같은 장밋빛 뺨과 손끝으로는 찬란한 밤을 매만지는 죽음의 천사.
그녀의 보드라운 맨발끝이 헬리시움 성채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디디면 그 자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봄 기운에 성채의 주인은 뚝뚝 비명을 지르며 죄어 오는 제 얼음을 고통스럽게 감싸쥘 수밖에는 없었다.
그 아름다움, 그 정렴함, 그 완전무결한 백색과 그보다 더 순수한 흑색으로 세공되어 밤의 보랏빛 장막과 푸른 우윳빛 안개 사이에서 장밋빛으로 물들어 반짝이는, 그 여자.
성채의 주인은, 자신이 그 예고 없는 침입자를 숭배하게 됨을ㅡ 끔찍히도 두려워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도 진실이나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하게 되고야 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 무결함, 순결함, 파괴와 지배를 근간으로 한 어떤 종류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섬세한 유약함. 그 누가 들끓는 배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가 그것을 욕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검은 뱃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막힌 욕구가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를, 그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남은 민들레를 제가 실려가기 전에 후 불어 날려보내고 싶은 그 간단하고도 원초적인 간질거림의 해소, 아름다운 꽃을 꺾어 가져가고 싶은 당연하기 그지없는 욕심. 그렇게 하면 그 줄기 끝에 살아있었을 것이 단순간 빛을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ㅡ그러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누군가가 채어가기 전에 행하고 싶은 그 깊은 파괴의 욕망, 암묵적인 신뢰의 연속을 깨고 가장 먼저 그것을 탐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는 가슴이 찢어지게 괴롭고야 말 것이다.
그 포르라니 말간 결백함, 그것이 천천히 빛을 잃고 다시 피어나는 것을 끝없이 바라보고 싶은 순수한 연모. 태초부터일지 혹은 학습된 것일지 분간가지 않는, 그러나 완벽하고 온전한 선의 형태를 띤 그 안타깝고 상냥한 온정.
그것은 분명히 또 다른 욕망이었다. 다정함의 이름을 가진 욕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가, 하나의 욕구는 그토록 존경받는데 다른 욕구는 비참하리만치 손가락질 당하는 것은! 그 정반대이고 비이상적인 깊은 욕구가, 지독할 정도로 괴로운 욕망이 가슴 안에서 비틀려 부딪히며 온 내장을 태우고 망가트리는 것을, 산 남자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뜯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매그너스는, 그 남자는.
그렇다, 그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Magnus, 위대한 자. 그 이름에 걸맞게도 위대한 왕좌에 올라 앉아 만물을 발밑에 두고 군림하며 비웃는 모든 죽은 것들의 왕이자 지배자. 꿈틀꿈틀 움직이며 생을 뱉어내는 지독한 형태의 검은 망령으로 둘러싸인 성채의 가장 안의 안에, 가장 높고 높은 곳에 느긋하게 앉아 도전자를 기다리는 패왕.
그의 다른 이름이 폭군인 것에 그 누구도 감히 이견을 표명할 수 없을 것임을, 매그너스를 단 한 번이라도 본 자라면 단번에 납득할 것이다.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짐승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번뜩이는 샛노란 눈동자, 땅에서 막 긁어낸 흙과 같은 메마른 색의 피부 위에 황폐한 죽음의 흔적이 흉터로 남은 검푸른 갑주를 두르고 저문 영광과도 같은 검푸른 머리카락 위 회색 그림자를 머금은, 칼날처럼 벼려진 냉혹함이 증오밖에는 모를 것 같은 눈매로 흘러넘치는 남자.
용의 피를 그대로 부여받은 노바의 상징인 갈색 뿔은 한 쪽을 잃고 그 아래로 이어져 눈을 가로지르는 절상으로 남아 지우지 못할 흉터를 그렸다. 갑옷의 틈에서부터 자라 기어나온 듯이, 냉막한 흐름으로 이어져 뻗어나온 날개는 차라리 악마의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갑주를 두른 긴 꼬리 뒤로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그런 남자였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났다. 적어도 매그너스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가 아는 죽음의 냄새는 전장의 것이었다. 묵직하고 시큼한 쇠 냄새, 코가 아릴 정도로 비린 피 냄새,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는 짐승의 내장과 거죽 밑의 썩어가는 살코기에서 나는 온갖 고약하고 지독한 잡내. 그렇다, 모든 죽은 것들에게서 나는 혐오스럽고 끔찍한 드글거림이, 그것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섬뜩함을 그대로 집약해 담아놓은 것 같은 망령의 냄새가.
그것은 실질적인 향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잔영에 가까운 것이었다. 죽음을 가까이에 둔 자만이 풍길 수 있는 냄새, 병상에 누운 환자나 낙사하기 직전의 인간에게서 나는 그, 생명이 다하기 직전의 이들이 내뱉는 그 강렬한 공포.
매그너스는 그 공포의 지배자였다.
죽음, 종말, 그 누구에게나 공정히 주어져 있는 가장 고통스럽고 완벽한 안식의 명제.
망령의 흐느낌을 망토처럼 두르고 사자의 뼛조각을 왕관 대신 머리에 얹은 매그너스에게도, 그렇다, 그것을 지배하는 매그너스에게도! 그것은 언젠가 거쳐가야 할 어떠한 관문이었고, 그리고 끝이었다.
오히려 죽음의 왕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늘 곁을 머무는 사신을 보았다. 그가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에게 다른 죽음을 건네는 것 뿐이었으니.
아아, 죽음을 진실로 지배하는 이가 있을까, 그 어떤 생물이라도 수명이 정해진 이상은 필멸하고 마는 것이다, 죽은 폭군은 단지 썩기 시작할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죽은 매그너스는 단지 사체일 뿐이다, 구더기가 들끓는 내장이고 거죽 밑의 썩어가는 살코기일 뿐이다. 지배자가 백성을 두려워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적어도 매그너스에게는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로 지배할 왕을 보았을 때.
폭군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순교자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는 환희했는가, 절망했는가, 혹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가?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은, 한 번의 죽음을 겪기 이전까지는 단순한 인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탈피하는 것만 같은 생물이었다. 최초의 죽음으로 겉가죽을 벗고 두 번째의 죽음으로 눈동자 위의 막을 벗어내고 세 번째의 죽음으로 쪼그라든 날개를 펼치는 것이다. 죽이면 죽일수록 찬란해지는 것을 아는가, 끔찍하게 살해할수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가. 매그너스는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여든 세 번째의 낮, 손 틈으로 뭉그러지는 장미꽃 덩어리가 그 새하얀 피부 위에 떨어졌을 때, 요정의 나라를 엿본 청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세상에서는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는 환희와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아름다움으로, 그것을 본 댓가로 영영 미쳐 버리고 만 청년의 이야기. 그는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난 뒤라면 그 어떤 진실도 오히려 미쳐 보이고 말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화락과 쾌락을 영영 찾으며 헤메이게 될 것이다. 매그너스가 본 것은 그 진리에 가까운 아름다움이었다. 미쳐 버릴 것 같은 아름다움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녀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명제였다.
죽어 있지 않은 그녀는 단순히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그란디스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족들과 비슷하게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그러나 그런 것 치고도 지나치게 무구하고, 서툴고, 덤벙대는 미숙한 여자아이.
그러나 그것을 살해할 때, 목에 칼을 찔러 넣고 심장을 잡아뜯을 때, 그리하여 그 하얀 낯에서 발그레한 생명의 기운이 죽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때, 아아, 그리고 그 다음 순간부터! 멎은 숨이 되돌아오고 사라진 심장이 장미처럼 피어오르고 핏빛을 띄던 상흔이 투명한 우윳빛으로 돌아오는 그 광경! 초점 없는 까만 눈동자에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이 별처럼 부서지고 어떠한 예술 작품처럼 바닥에 퍼진 검은 머리카락의 물결 위로 꽃잎 같은 피가 잔잔히 스미는 그 아름다운 광경! 시간을 돌린 듯이, 죽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뽀얀 살결과, 어찌 보아도 명명백백한 살해 현장이라는 것이 인식되는 흉기와 살덩어리와 피의 잔상들. 그 부조화, 그 모순. 매그너스는 사신을 다스리는 손을 보았다. 힘없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흰 손 위로, 그가 지배하는 왕국의 주민들을 보았다. 아아, 그것의 이름은 죽음, 죽음! 단 한 점의 공포도 없는, 그가 알고 있던 것이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알리는 그 완벽한 파멸!
매그너스는 환희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괴로움으로 쾌락을 느꼈다, 오열하고 날뛰며 희열을 맛보았다. 그가 찢어 발긴 것은 죽음의 현신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지배하고 싶어 하던 왕국이었으며, 그리고 차라리 매그너스 그 자신인 것이었다.
어째서 괴로운 것인가,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며 경외가 아닌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어째서 마냥 통쾌하게 웃어젖힐 수 없는가! 아주 간단한 것이다. 매그너스는 그 소녀를 사랑했다. 무구하고, 서툴고, 덤벙대는 그 미숙한 여자아이를 지독하게 사랑했다. 그것이, 그 죽음이, 죽어가는 눈으로 마른 숨을 내뱉으며 가녀리게 속삭이는 사랑한다는 말에, 온 정신이 망가지고 내장이 뒤틀릴 것 같은 행복을 느꼈다.
사랑은 지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사랑이 오히려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사랑을 지배할 수 있다 소리치는 사람이라고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사랑해 보지 않은 인간밖에는 없지.
매그너스는 지배자다, 그가 지배할 수 없는 것은 그를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지배할 수 없는 감정, 그 감정!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그리하여 그것이 그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조차 치가 떨리는 그 감정!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지만, 그 여자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둘은 같은 것이었고, 결국 감정의 이름은 그 여자였다. 그리하여 그 여자를 죽이는 것은, 그 감정을 죽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죽이더라도 죽일 수 없는 그것, 몇 번을 살해하더라도 또 다시 살해할 수 있는 그것. 그리하여 그가 멈추어 놓을 수 없는 그것, 그가 지배할 수 없는 그것은.
폭군이 지배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살아있는 한 그의 지배는 유지된다. 그리하여 지배되지 않는 무언가가 산 폭군의 앞에 서 있을 때, 그 야트막한 옷깃과 흰 목덜미와, 장밋빛 뺨과 보드라운 피부 따위를 소중히 여기고야 말 것 같다는 것을 직감하였을 때, 그리하여, 그리하여 지배할 수 없으리라고, 마음 속에서 절규 같은 울부짖음을 들었을 때.
그는 두려워지고 말았다.
그 여자의 존재는 단순히 지배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쌓아 온 모든 지배와 군림의 법칙을 송두리째 부숴 놓을 수 있는, 그가 손에 쥔 모든 권력을 버리고, 노예와 다를 바 없이 흙바닥에 뒹굴더라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버릴 것만 같은.
그의 근간을 흔드는 그 감정, 그 어떤 것.
이 세상을 유지하는 법칙에서 유일히 벗어난 그 어떤 것.
그 여자에게서는 늘 달콤한 향이 났다. 물기 어린 사과 향, 제비꽃 설탕 절임을 얹은 파운드 케이크, 방금 막 표면의 설탕을 태운 크림 브륄레. 그 여자의 목덜미에서는 캬라멜 냄새가 났다. 불에 댄 설탕의 씁쓰레하고 단 향기, 그 혀가 아린 달콤함.
살아 있는 무언가에게서 날 수는 없는, 놀랍도록 군침 도는 디저트의 향기. 탐하고 갈구하도록 설계된, 욕망하고 파괴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어떠한 단순하고 무고한 인외.
이것은 망가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매그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지배될 때는, 법칙 안에 갇힐 때는, 그리하여 그가 왕이 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을 파괴할 때 뿐이었으니.
매그너스는 그 달콤함을 욕망했다, 매그너스는 그 핏덩어리를 숭배했다, 매그너스는 그 무결함과 청렴함을 증오했다, 매그너스는 그것의 죽음을 갈망했다.
매그너스는 그 여자아이를 사랑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이제 와서는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 없는 일이리라. 그 여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자신을 탈피시킬 죽음, 그 단 한 번의 죽음. 매그너스가 검을 휘두르기로 결정했던 순간에, 자신의 죽음 대신 다른 이의 죽음을 제물로 바치겠다 생각했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덫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아, 왕좌에 앉을 때부터 예정된 몰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어쩌면 그것으로 탈피당한 것은, 새하얀 버터 같은 가슴팍에 나이프를 덧바르듯 한 겹 한 겹 검을 찔러 넣을 때마다, 볼에 튀었던 핏방울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폭군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순교자의 지배는 죽음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그 순교는 대체 무엇에 대한 것이란 말인가. 무엇을 움직이는 것이란 말인가.
적어도 그 날, 몇 번째의 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죽음의 순간, 그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육체를 제 지배하에 놓은 순간에. 그리하여 자신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과 그에 수반하는 강렬한 쾌락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통쾌함과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자괴감으로. 그리하여 웃으며 울며 희열하고 오열하고 폭소하고 절규하던 그 날에.
그 새까만 눈동자, 텅 빈 눈동자, 죽음이 없는 이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가, 저를 까맣게 마주보던 순간. 왜 우냐고 묻는 듯이 무고한 얼굴로, 제 죽음을 잊어버린 듯한 말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순종에.
매그너스는 그것으로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한참 전부터 미쳐 있는 쪽은 그였다는 것을.
죽음에서는, 죽음에서는 캐러멜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달콤한 몸 안에서 설탕이 탄 듯한 씁쓰레한 향이 남아 돌았다.
매그너스는 끈적끈적한 검은 피를 손에 쥐고 얼굴을 부볐다,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그 죽음의 순간이, 제 손으로 펄떡대는 맥을 잡아 눌러 꺼트리는 순간이,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는 순간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마저 부정하는 순간이, 제 손으로 그 여자를, 자신을 망가트리는 그 여자를 살해하는 순간이, 그리하여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신을 살해하는 순간이.
그것만이 그가 살아있는 이유인 것만 같았다.
“......왜 계속 오시는 거예요?”
벨데로스는 빨갛게 물든 걸레에서 핏물을 쭉 짜내며 시선을 흘끗 돌렸다. 방의 구석진 곳에 웅크려 있는 여자는 끝 부분이 너덜너덜한 갈색으로 변색된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있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선명할 정도로 하얬다, 생채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군데군데 고인 핏자국만을 닦아낸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매그너스 님을 사랑하니까.”
얼굴을 뵙고 싶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단순히 그것 뿐. 그런 자그마한, 연약한, 사랑스러운ㅡ 사랑에 빠진 이다운 염원.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다. 아주 초반에는 그랬던 것도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살아 돌아오는 침입자를 처리하는 것에 이골이 난 매그너스와, 그가 대화라도 하자며 준비한 다과를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었던 침입자.
이물질이 섞이는 순간 어긋나는 관계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이물질은 매그너스에게는 추호도 쓸모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이래도 사랑한다고 해 보시지. 오, 놀랍군. 아직도 나를 사랑해?
네, 사랑해요.
그런 것으로 그녀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몇 번을 살해당해도, 마구잡이로 난도질당하고 목을 졸리고 심장을 꿰뚫려도. 그가 그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고문하더라도.
르네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의 사랑은 차라리 저주에 가까워서, 밑 빠진 독이라면 자신이 기어들어가 그 빈 자리를 채우고 잠겨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헌신을 아낌없이 퍼부어 내었다.
매그너스는 사랑한다는 말을 싫어했다. 그런 감정들을 싫어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흔들리는 이를 비웃었다. 쓸모 없는 이라 여겼다.
그러니, 그가 흔들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매그너스가 르네를 사랑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들 아래 깔려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말 테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르네는 단지 사랑을 했다. 매그너스가 기뻐하기를 원했다. 그 어떤 광기도, 자신을 향해 터트리는 것이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광기도, 그 어떤 방식이더라도.
“...그 꼴을 당하시고도 사랑하신다니 놀랍네요.”
르네는 지친 표정으로 벨데로스를 올려다보았다. 우윳빛 푸딩 같은 뺨 위에 딸기잼 같은 핏덩이가 몽그랗게 고여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초콜릿 아이싱마냥 핏자국이 남은 피부 위에 들쩍지근하게 달라붙어, 그 힘없는 움직임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 눈은 이미 죽은 사람의 것이었다. 생기라고는 한 조각도 남지 않은 공허하고 허망한 눈동자, 살아 움직이는 시체, 망령이나 혹은 어떠한 계기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과도 같은, 그런 눈으로, 그녀는 말했다.
“너는 스테이크를 난도질할 때 그 고기에게 죄책감을 느끼니?”
설탕 유리 같은 목소리가 그 무엇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그런 거야, 벨데로스. 그냥 그런 거야.”
나는 그냥 그런 거야.
그냥 고깃덩이, 그냥 미식. 달콤한 먹잇감, 즐거운 오락 기구. 물건은 감정을 모르는 법이다, 음식은 본디 씹어 삼켜지는 것만이 운명이었다. 그녀는 매그너스를 위해 소모품이 될 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잠자리를 뜯고 노는 것과 같은, 그 순수한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벨데로스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 흰 옷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인 그 핏빛에서는 손끝으로 짓이겨진 석류 같은 향이 났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붉은색은 그러나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잘 빚어진 설탕 인형.
장미수를 섞은 딸기 시럽을 발라 발그랗게 물들인 손끝과 복숭아 즙으로 색을 낸 투명하고 말간 콧등, 꽃잎을 갈아 꿀과 잘 버무려 붉게 만든 것을 곱게 펴바르고 슈가 파우더를 뿌린 발갛고 보송보송한 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투명하게 흰 슈거글라스로 이루어진 그 섬세한 여자아이.
먹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든 애써보려는 듯이 윤이 나는 머리카락은 그러나 차라리 검은 꿀을 적신 검은 설탕 비단실이었고 그리하여 결국에는 다디단 여운만을 남기며 후두둑 끊어져 내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녀의 눈은 무슨 색이었나요?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는, 설탕을 잔뜩 넣어 달았던 것만이 혀끝에 남아 있는 우유 푸딩.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자다. 완벽하게 달콤해 보이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장식되고 세공된 어떠한 조각상 같았다.
완벽하게 사람이 아니었다.
그 설탕 덩어리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죽어 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