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지.
잿빛이 도는 머리칼은 넓게 퍼졌다. 그런 생각과 함께 넘어오는 숨이 쓰디썼다. 아픈 것 같기도 해. 조금은.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한 것 같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아직도 버릇처럼 말을 꺼낸다. 항상 누군가와 같이 있었던 것처럼. 아,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지워지지 않는 습관과도 같았다. 지워내야 하는데, 언제쯤 지워낼 수 있을까. 내가 죽을 때 쯤? 그도 아니면 네가 죽을 때 쯤?
근데 말이야, 나 사실은 조금 지친 것 같아.
아무래도 여기가 끝인가봐.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의미 있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포트 마피아. 누가 봐도 악역은 내 쪽이었다. 이 손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앗아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손을 바라보면서 한탄을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결코 착하지 않았고, 올바르지도 않았으며,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내게 있어서 너를 바라보는 것은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닌가, 거울은 조금 과도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보는 너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훨씬 더 악독한 사람이었으니까. 흥미 위주의 행동, 좀처럼 읽을 수 없는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이능력과 결코 약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신체능력이라던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검은 코드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사람. 가장 어린 나이에, 간부의 자리까지 올라간 불쌍한 사람.
그런 그 사람을, 나는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어떻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느낌인 것 같았다. 마지막이 되는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게 그 얼굴이라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아마도 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일 텐데. 억울할 지경이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이미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지고 여기가 끝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는데, 내 인생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죽음이 다가온다. 한 발짝 다가온 것 같았는데, 벌써 내 곁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자네가 싫지는 않았어.”
아, 이런 젠장. 이제는 환청마저 들려오는 것 같다. 익숙한 미성, 묘하게 특이한 말투. 그의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들리다니, 아무래도 내가 그를 좋아하긴 했나보다. 죽기 전에는 세계가 이리도 상냥한가. 하지만 이것도 곧 사라질 꿈이라면, 어차피 깨야할 꿈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대로 눈을 감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말 좀 해보게.”
“하하, 환상 주제에 꽤나 퀄리티가 높잖아.”
“눈을 떠, 그리고 나를 좀 보게나.”
답지 않게 애절한 목소리였다. 역시나, 아무래도 나의 이 죽지도 않는 애정이 반영된 모양이었다. 이기적인 상상의 결과물인가. 사람을 죽기 직전이라면 정말 뭐든지 해낼 수 있구나. 그 동안의 삶이 스쳐지나가면서 이것이 주마등인가, 라는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하며 숨을 들이 삼켰다. 잘 올라가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여전히 답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끝까지 잘생긴 사람이네요. 당신은.”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나, 자네는.”
“끝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터무니없는 말도 제법 잘 나오는가봐요.”
“끝?”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환상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래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얼굴이 그의 얼굴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꽤나 행복한 이야기 같았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그릴 수 있는 최선의 해피엔딩.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만큼 단촐하다. 짧다면 짧은 이 삶을 걸어왔으면서도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결국 내가 좋아한 사람의 얼굴 하나면 된다니. 원래도 욕심이라고는 삶에 대한 것뿐이었는데. 그것마저 잃으니 정말로 아무래도 좋은가봐.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내가 만족하니까.
“어차피 환상이라면, 빌어먹을 고백이라도 해볼까.”
“…환상이라니.”
“좋아했어요.”
아마도, 지금도 좋아하고 있을 거예요. 그 부분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비겁했고, 야비한 사람이었으니까. 좋아하고 있어요. 죽을 때가 되어서야 확신이 섰어요. 내가 계속 당신을 바라봐왔던건 그런 이유였어요. 그랬던 건가봐요. 눈꼬리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아픔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깨닫자마자 겪은 이별 탓인지. 흘러내린 눈물은 그대로 땅을 적신 것 같았다. 축축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좋아했어.”
혼미해지는 시야의 틈에서 나는 되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발버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바란다면, 이 마음으로 내가 삶을 더 부여잡는다면, 내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생길까봐. 기적이라도 생길까봐. 아, 하느님. 거기 계신지 알 수도 없는 신이시여.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살고 싶습니다. 저에게 남은 것은 오롯이 삶에 대한 욕망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업인가요. 제가 누군가의 것을 앗았기에 받는 대가인가요. 삶을 구걸하기 위해 신에게 빌어보려 했지만 결국은 나의 죄였던 걸까. 내 손에 의해서 생명을 꺼트렸던 사람들은 모두 이런 기분이었던 걸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 환상은 여기까지인가. 달콤한 꿈은 이곳에서 멈추는 모양이다.
나는 이제 가야할 때인가.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생각을 멈춘다면 나의 생명은 그대로 다 타버린 재가 되는 건가. 허탈하다. 아, 네가 나의 뺨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당신, 지금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닌 거구나?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시간이, 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괜찮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