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마법사 X 매화
[잊지 못할 기억]
지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새카만 밤의 숲. 그것이 그가 매화에게 조곤조곤 이야기 해준 평온의 숲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계에서 갑작스럽게 떨어진 매화는 그것이 꽤나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생각했었다. 깊은 곳에 위치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밤의 숲,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순백 색의 웅장한 건물은 언뜻 보면 신성한 느낌까지 들게 하였다. 처음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빛을 연구하는 자들이 지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연구를 하다니, 하지만 그런 의문증은 하얀 마법사의 말을 듣고 물거품 처럼 사라졌다. 어느날 밤의 옥상에서였다. 그날은 유난히도 어두운 날이었고 그덕에 새카만 비단결에 뿌려놓은 작은 빛 알갱이 처럼 별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 어느것도 비추지 않는 새카만 밤하늘에서 유유히 제 빛을 뿌리던 그 광경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하얀 마법사와 매화는 나란히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정적을 비집고 하얀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것이요?'
'저에 대한 것, 더 나아가 제가 연구하는 것들과 그것을 행하는 이유 말입니다. 줄곧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습니다, 어째서 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
나란히 앉아있던 그가 몸을 돌려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 본다. 매화는 새카만 밤 하늘 아래에서 마주보는 그의 눈동자가 참으로 빛나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모든 것을 알고있는 가장 위대한 현자이자 대마법사도 이런 의문을 가지는 구나. 덧없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찰나, 한없이 냉철하고 이성적이게만 보였던 하얀 마법사가 조금은 감성적이게 느껴졌다.
'물론 묻고 싶었죠, 근데 조금 겁이 나더라구요'
'무엇이?'
'저는 상대방이 차갑고 날 선 반응을 보일까봐 항상 조심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마법사님께도 무언가를 묻는게 쉽지가 않았어요'
'그러십니까'
그 이유를 왜 인지 알 것 같아 하얀 마법사가 착잡한 마음으로 답했다. 자신을 이루는 것들은 이성과 냉철함이라고 그리 여겨왔었는데, 문득 매화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눌때이면 그것들이 조금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대화하는 내용이 그가 가장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 여겼던 사소한 잡담이라 하여도. 그래서 하얀 마법사는 한번 더 그것들을 흐트리기로 하였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흔들릴 것이 분명하다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쓸데없는 것이군요, 제가 당신에게 그런 태도를 보일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요? 정말 다행이다'
하긴, 마법사님이 그러실리가 없죠. 멍하니 있던 매화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게나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남의 눈치만 살피며 제 행동거지에만 신경쓰느라 숨 막히고 각박했던 삶에서 이제야 완전히 해방 되었다는 것이 또 한번 실감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난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한걸지도 몰라. 매화는 하얀 마법사를 마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그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밝고 명량했다.
'마법사님의 진짜....이름은 뭐에요?'
'안타깝게도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떠돌다 보니 제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어서 잊어버렸죠. 물론 그다지 제가 신경 쓰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더 질문하시죠'
'그럼 계속해서 마법사님으로 부를께요. 음, 그 다음은... 아, 마법사님이 아까 말씀 하신거. 그 연구하시는 것에 대해 물어도 되나요?'
'물론이죠. 아시다시피 저를 포함한 이곳 오로라에서는 빛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궁극의 빛에 대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가장 어두운 이 평온의 숲에 들어와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궁극의 빛은 궁극의 어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음..뭔가 되게 심오하네요, 솔직히 어렵기도 해요.'
'그런가요'
'그래도 확고한 신념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게 정말 대단해 보여요. 오히려 부럽기도 한데요?'
그 말에 하얀 마법사가 옅게 미소 지었었다. 분명 매화도 자신의 목표가 생길겁니다, 매화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리 말하며 짓는 그 웃음은 매화에게 거짓 하나 섞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해서, 매화도 같이 마주 웃어버렸다. 그 순간이, 시간이,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었다. 아름드리 나무 밑에서 꿈꾸던 풍경처럼 그림으로 그린듯 아름다던, 그런 추억이었다.
새카만 하늘에 까마득한 별 하나. 그때 보았던 풍경과 똑 닮은 정경이라 저도 모르게 그리웠던 기억이 자신의 뇌내를 비집고 기어 올라왔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모든 비참함의 시작이었던 그때의 시간을 지금와서 떠올리려 하니 누군가 날카로운 날붙이로 자신의 심장을 헤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매화는 두손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창백하게 마른 손가락 새로 미처 주워담지 못한 눈물들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아득한 그날의 기억은 더이상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추억이 아니라 자신을 잔혹하게 비웃는 미련으로 남아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는 그 미련 때문에 아직도 자신은 끝없이 기다리고 있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에서도 홀로 하얗게 빛났던 그는 이제 더이상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다. 선하고 이성적인,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 다정한 성정의 하얀 마법사는 이제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한순간에 모든것이 뒤집어졌으며 모든것의 이치가 바뀌어 버렸다. 그 누구보다도 새하얗던 마법사는 결국 그 누구보다도 검게 떨어져 버렸다. 다정하고 온화한 성정은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도 쉽게 변해버렸고 그것이 매화에게는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매화는 과거의 공포를 아직도 가슴에 품에 안고있었고, 그 때문에 아직도 저는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것들이 끔찍할만큼 무서웠다. 그리고 제가 마음에 품은 사람은 하룻밤만에 그리 미쳐버렸다.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가장 두려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요,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미처 채 삼키지 못한 울분이 그녀의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와 제 억눌린 서러움을 뱉어낸다. 나의 희망이었는데, 정말로 믿었는데..!
그날, 하얀 마법사가 타락한 날. 차라리 그가 같이 가자고 제안했을때 따라가야 했었을까, 그랬다면 이리 속을 헤집지 않아도 됬었을까. 하지만 제 스스로에게 되내인 물음에 대한 답은 저도 이미 알고있었다. 아마 따라갔다 해도 저는 평생을 괴로워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더디게 마음은 헤집어졌겠지. 붉게 물들은 채 여물지 못할 제 마음이 너무도 가여웠다. 그래도 아직도 저는 검게 변해버린 그 마법사를 생각한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지금도 마법사는 자신을 찾고 있었지만 자신은 미쳐버린 그가 무서웠다. 따라가지도 못할 것이고 함께 하지도 못할 것이면 차라리 속에서 지워버리면 좋을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 사람이, 기억이 아직도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차라리 당신의 기억속에서 나는 죽었어야 했다,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면 나는 괴로워도 더는 미련갖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당신의 기억속에서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 걸음 마다 이리 미련이 발목잡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 마음마다 비참함이 남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 눈물은 마를 날이 없겠지. 붉게 헤집어진 마음은 저물지 못하고 남아 끊임없이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