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변한 것이.
처음에는 단순히 우울한 거라고 생각했다.
종종 그래왔듯이.
2.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걸까.
근래 들어서 고개를 제대로 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물어보기라도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그냥 가버린다.
늘 빛나던 눈동자가 반쯤 감겨있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3.
오랜만에 섬에 정박했다.
혹시 그녀가 기분 전환이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에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한다.
뭐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싫은 걸 저렇게까지 억지로 하진 않는다.
봄섬.
꽃이 여기저기에 만발해 냄새가 날린다.
사람도 없고 조용한 가로수길.
평소 꽃을 좋아해서인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있다.
좀 기분이 풀린 것 같아 안심이다.
좀 더 걸어서 공원에 도착했을까.
갑자기 그녀가 걸음을 멈춘다.
조로...
조로...
그냥 가자...
필사적으로 내 손을 잡아 끈다.
온몸을 벌벌 떨다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울면서 애원하는 모습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바라본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그녀를 보고 수군거린다.
제발 가자. 조로...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기 있기 싫어...
결국 급하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배로 돌아오는 동안 내 옷자락을 꽉 잡고 고개를 가리며 계속 울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는다.
4.
방문을 덜컥 열었다.
책상에 앉아있던 그녀가 급하게 공책을 닫아 서랍에 넣는다.
그리고 웃으며 본다.
요리사 자식이 점심 먹자고 불러서 왔다고 하니 어쩐지 안심한 표정으로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식사 도중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방을 들어간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다 공책을 꺼낸다.
짜증나. 짜증나. 다 죽었으면. 건들지 마. 내 꺼야. 쳐다보지 마. 내 꺼야. 내 꺼야. 짜증나. 보지 마. 다 죽어줘. 다 사라줘. 아무도 없어야 해. 나만 볼 수 있어.
사랑해줘. 나만 사랑해줘. 더 사랑해줘. 죽을 듯이 사랑해줘. 더 더 더. 집착해줘. 원해줘.
평소 그녀의 글씨체와는 다르게 휘갈긴 글씨. 너무 힘을 주워 찢어진 곳과 구겨진 곳. 볼펜이 번진 곳 까지, 공책 한 면을 다 채운 저주는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5.
샤워하고 나와 막 잠 들려고 침대에 앉는데 그녀가 부른다.
조로.
뒤돌아 그녀를 보니 달려들어 키스한다.
움찔하면서도 받아주긴 했지만 그녀가 먼저 키스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뿐더러, 그녀답지 않게 성급했다.
그녀의 힘으로는 밀리지도 않겠지만 그녀가 미는 데로 침대에 누웠다.
급하게 자신의 와이셔츠를 푸는 그녀.
손이 떨리는지 자꾸 미끄러진다.
급하게 입을 떼고 그녀의 양손을 잡는다.
해줘...하자. 조로...응...?나 안아줘...
애원한다.
그녀가 다시 나에게 입을 맞추려고 할 때 옆으로 살짝 피해 그녀를 밑에 눕힌다.
그녀가 눈을 꼭 감고 있다.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뺨으로, 목으로, 어깨로, 손을 내린다.
그녀의 눈썹이 떨린다.
천천히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옆에 눕는다.
조로...안 해?
어어.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꽉 끌어안아 품에 얼굴을 묻게 한다.
그녀가 나오려고 바동거리는 소리와 여전히 애원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눈을 감고 무시한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6.
밤에 혼자 갑판에서 술을 마시다가 하늘을 보니 별이 잔뜩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다 빈 술병을 바다에 버리고 방으로 돌아간다.
문고리를 잡을 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울음소리.
당연히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봐야하는데 어째서인지 그대로 문고리를 놓고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다.
다음 날.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니 약간 부어있는 눈으로 무슨 소리냐며 웃어버린다.
7.
비가 왔다.
다른 녀석들도 각자 방에서 할 일을 하는 어쩐지 조용한 하루.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뒤에 깼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가 방에 없다.
문을 열고 나간다.
아직도 비가 내려 뻑뻑한 문.
젖은 갑판의 끝에 그녀가 앉아 있다.
다가간다.
가까이 갈수록 나는 피비린내와 붉은 액체.
놀라 그녀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는 단도.
피가 굳어 엉킨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양 손목.
화가 나서 소리친다.
너...뭐가 문제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
뭘 어떻게, 얼마나 더 사랑해야 멈출거냐고.
고개를 숙인다.
한눈에 봐도 더 얇아진 손목을 세게 쥐다가 놓고 방으로 들어간다.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8.
손목의 상처가 흉터가 될 쯤.
그 흉터를 붕대로 가리고 있을 때 쯤.
칼 손질 하고 있는 그녀가 다가왔다.
그날은 맑았다.
조로.
......
아직도 화나 있어?
...글쎄.
조로.
......
나 사랑한 거 후회해?
아니.
...나도.
살포시 어깨에 기댄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9.
그녀가 서 있었다.
갑판의 난간 위에.
나를 바라봤다.
조로.
너 따라 죽고 싶은 심정이란 거 알아?
응.
그럼에도 지금 내가 죽을 수 없다는 것도?
...응.
너 없이...못 산다는 것도?
...물론이지.
...이기적이네.
나도 마찬가지니까.
웃었다.
나를 보고.
그리고.
10.
지금도 파란 바다의 한 구석이 붉게 일렁거려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