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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 드림 합작

노래의 왕자님

미카제 아이 x 현비파

 

 

   이유 없이 처지는 날이 있다. 하늘이 흐린 것도, 비가 오는 것도, 공기가 축축한 것도 아니었다. 악몽을 꾼 것도, 아침부터 안 좋은 소식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눈을 뜨고 아침 공기를 마시자마자 예감한다. 오늘은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날이겠구나 짐작한다. 이런 날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날의 우울을 탓하게 된다. 비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임을 직감했다. 아침 일찍 사무소에서 사오토메와 회의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이 있었지만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불로 몸을 싸매고 침대에 앉아 있다가 벽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으니 더욱 일어나기 싫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나가는 것보다 이게 더 나아보였다.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이불을 얼굴까지 덮고 이대로 자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눈을 감았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까지 잘 자고 일어난 침대가 불편했다. 이불도 무거웠고 베게도 딱딱한 것 같았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침대를 눌러보고 베개를 두드려 보았으며 이불을 만져보았다. 침대와 베게는 푹신했고 이불은 가벼웠다. 비파는 이것이 마음의 부채에서 오는 것임을 알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사오토메와의 회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나가야 했다. 그 일만 끝내고 바로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지만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룰 수는 없었다. 세 달 전부터 계속 미뤄져 왔다. 비파 혼자만의 이유는 아니었다. 겨우 스케줄을 맞추면 레이아가 비상이 걸려서 경시청으로 불려가거나 린이 급한 스케줄로 빠졌다. 미즈키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꽃 배달 주문 때문에 미루기도 했다. 이쯤 되니 굳이 넷이 다 같이 만나지는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린이 안 된다고 말했다. 벽시계를 보니 이제 여덟시가 다 되어간다. 비파는 이불을 걷었다.

   샤이닝 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류야가 다가왔다. 사오토메가 다른 회의 때문에 조금 늦어진다고 했다. 바람같이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이지만 약속을 어기거나 늦는 rudd는 한 번도 없었다. 비파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류야가 별 일 아니라고 말했다.

   “류야, 비파 머리 쓰다듬는 건 자제 좀 해줄래?”
   “비파씨가 놀란 것 같아서 말이야.”

   “아이, 난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알아. 비파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쓰담 받는 걸 좋아하니까. 그래도 이젠 안 돼.”
   단호한 목소리에 비파가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이 앞에 서자 아이는 자연스럽게 비파와 시선을 맞첬다. 물빛을 담은 고요한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빙긋 웃었다. 아이가 한 번 눈을 깜박였을 때, 비파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순 당황하여 커졌던 눈이 곧 불만을 품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그런 거 아닌데?”
   “이게 어린애 취급이 아니고 뭐야?”
   “귀여워서 쓰다듬어주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니야?”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비파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으며 손을 내렸다. 아이의 앞머리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역시 우울할 땐 이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는가 보다. 밑으로 처졌던 어깨가 조금 펴지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파는 손을 뻗어서 아이의 앞머리를 정돈해주었다. 류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이 깨알 쏟아지는 건 상관없지만 여긴 사람 눈에 띄기 쉬우니까 안으로 들어가자.”
   “네. 아이는 이제 스케줄이지? 버라이어티 방송이었지 않아?”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아이는 버라이어티 방송을 낯설어했다. 방송에 나가도 사람들의 대화에 적절한 반응을 넣지 못했다. 현재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돌이기 때문에 섭외는 자주 오는 듯 했지만 사오토메가 잘 내보내지는 않았다. 1년 전쯤에 아이 스스로가 버라이어티 방송은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굉장히 높은 봉을 마주한 높이뛰기 선수처럼 그는 계속 도전하였다. 데뷔 5년차인 지금도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비파가 아이의 앞머리에 손을 뻗어서 정돈해주었다. 아이가 말했다.

   “비파.”

   “응?”
   “오늘 외식할래? 같이 있고 싶어.”
   비파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다시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비파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집에서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안 될 건 없지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우울해서.”
   아이는 비파의 대답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냥이라는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 친구들이랑 헤어지고 나서 만나자. 오늘 스케줄도 그 즈음이면 끝날 거야. 집 앞 공원은 어때?”
   “응. 고마워.”
   비파는 당장이라도 아이를 끌어안고 싶었다. 눈물이 한가득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트인 공간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비파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웃었다.

 

 

   친구들과 만나고서도 우울함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길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도, 소화가 잘 안 돼서 속이 더부룩한 것도 모두 우울한 탓이었다. 미즈키는 피곤하냐고 묻고 레이아는 커피를 한 잔 사주었으며, 린은 편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미리 잡아주었다. 가는 곳마다 폐를 끼치게 되는 것도 모두 우울한 탓이었다. 비파는 친구들과 고기를 먹으며 더부룩한 속을 탄산음료로 달래었다. 아이에게선 저녁 8시 반쯤에 공원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메일이 왔다.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6시 25분이었다. 린이 고기에 술도 시키자는 걸 간신히 말렸다. 린은 주량이 세서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항상 먼저 쓰러지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었다. 술을 시키는 순간 오늘 집에 돌아가는 건 포기해야 한다. 아이와의 약속을 이야기하고서야 린은 술을 포기했다. 비파는 7시 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더 있자는 린을 미즈키가 잡았다. 세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거리로 나왔다. 공원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었다. 공원에서 기다릴지 근처 카페에라도 들어가 있을지 고민했다. 봄이라고 하지만 날은 아직 쌀쌀했다. 먼저 집에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조금이라고 같이 걷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비파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을 꺼냈다. 8시 5분에 도착한 메일에는 마지막 스케줄이 끝났다고 적혀 있었다. 비파는 가방 안에서 책을 꺼냈다. 어제 책갈피를 꽂아둔 부분을 펼쳤다. 125쪽 첫 번째 문장을 읽고 어제 중요한 부분에서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가 앞에서 책을 건드렸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몇 번 불렀는지 알아? 이런 시각에 공원에서 책에 누가 와도 모를 정도로 빠져있으면 위험해.”

   “미안해. 책이 워낙 재밌어서.”

   “얼마나 앉아있었던 거야?”
   “음, 대략 10분 정도네.”

   “충분히 위험한 시각이야. 요즘은 위험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더욱 주의하는 게 좋아.”

   “다음부턴 조심할게.”

   “이제 집에 가자.”

   비파는 책을 가방에 넣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10분 사이에 체온으로 따뜻해졌는지 엉덩이와 허벅지 뒤쪽이 서늘해졌다. 아이가 비파의 손을 잡았다. 날씨에 맞춰서 조금 체온을 높였는지 따뜻했다. 비파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오늘 친구들이랑 즐겁게 보냈어? 굉장히 오랜만에 만났잖아. 저번 약속 이후로 3개월하고도 6일이 더 지났지 않아?”

   “카페도 가고 고기도 먹고 즐겁게 보냈어. 린이 술 마시자고 하는 걸 간신히 말리긴 했지만.”

   “잘했어. 술이 몸에 나쁜 것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마셨으면 못 빠져나왔을 거야.”

   “린이랑 같이 마신 적 있어?”

   “샤이닝 사무소 신년회에서. 린이 레이지랑 류야랑 란마루를 붙잡고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어.”

   “불 보듯 하네. 그 세 사람 다 뻗었지?”
   “린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양주 가져오라고 외치는 것도 봤어.”

   비파가 크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며 비파는 크리스마스 때의 이야기를 했다. 크리스마스 당일 린의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모여서 다 같이 파티를 했다. 당연히 술도 마셨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린이 청주 5병을 비웠다. 맥주 2잔 마시고 잠들었던 비파가 혀를 내두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비파를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를 올려다보고 비파는 살짝 웃음 지었다. 아이가 말했다.

   “집에 가면 같이 자자.”

   “응.”

   “목욕도 같이 할래?”
   “응.”

   “홍차는 가향차로 우릴까? 아니면 스트레이트?”
   “오늘은 과일 허브차가 좋아.”

   “알았어. 디저트는 비스킷으로 내놓을게.”

   “응.”
   맞잡은 손은 어느새 깍지를 끼고 팔을 얽혔다. 피부로 전해지는 온기에 비파는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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