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이라는 병증은 기묘한 것이다.
그것은 난치병이고 합병증을 부르며 치사율도 높다. 전염성도 있으며 육신을 망가트리기도 한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편견으로 깎여 틀에 눌려 있는ㅡ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이미지화된 환자를 만든다. 그런 환자는 존재하나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늘 그래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볼의 선을 따라 올라가 관자놀이를 지나고, 밤하늘을 잃은 듯이 흘러내려 흐트러진 새까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장밋빛 손끝의 나긋한 움직임, 이어 머리카락을 모아 잡고 어깨 앞으로 넘기는 연속적인 행위에 흰 목덜미의 옆선이 드러난다. 헐거운 원피스의 목소매 사이로 도드라진 쇄골 선이 들여다보이고, 얄팍한 천이 부드러운 육체의 굴곡 위로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덧없을 정도로 연약하고 섬세한 움직임에 하얀 치맛자락이 맥없이 흐트러진다.
병사(病死)가 허락되지 않은 육체의 불치는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고된 것인가?
내리깔린 눈을 문득 들고는 빛이 비쳐 들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이 파편처럼 산발적으로 흩어져 시선에 아프도록 박힌다. 매그너스는 서류 위에서 움직이는 깃펜을 잠시 멈추고 공중에서 빛나는 흐린 먼지들이 흐린 유리를 투과해 새어 들어온 햇빛 아래에서 그 회상적인 신형과 함께 희부옇게 사그라지는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옅은 금빛이 산란하는 느릿한 오후의 단편적인 광경은 언젠가의 추억에서 본 것만 같은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아서, 문득 그에게 존재하지조차 않는 과거에 대한 기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는 했다.
그 육신은 존재하지 않는 태초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누구도 갈망하나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이상향으로, 그리하여 지독히도 그립고 원하는 욕망적인 것으로, 퍼뜩 정신을 차리면 사라질 것만 같고 잠시 눈을 뗀 사이에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감히 자신의 숨소리가 그 세상에 끼어들어가는 것이 죄악으로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요정의 발자취처럼 느껴지는, 그리하여 함께한 7년이 7일로 화하여 모두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그 허깨비 같은 아지랑이.
매그너스는 그 허상을 사랑했다.
“르네.”
르네는 고개를 들었다. 부서지는 빛의 파편이 눈앞을 가려 시야가 아른아른 희뿌옇게 흐렸다. 그러나 와 닿은 목소리의 잔해만은 선명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바라보는 신형은 어둠 속에서 파르라니 빛난다.
어슷한 군청이 도는 흐린 그림자 색의 머리카락이 암흑 아래 푸르게 가라앉고 짙은 모래 색의 피부 위를 검게 덮은 갑주는 칼날처럼 어슷하게 번뜩였다. 그 검은 색채와 형태로 악마를 연상케 하는 용의 날개에 핏줄처럼 도드라진, 어두울수록 희게 빛나는 문양. 갑주로 덮인 긴 꼬리, 한 쪽이 잘린 날카로운 뿔... 뿔과 함께 남은 오른얼굴의 상처. 망령의 그림자가 늘어진 왕좌 위에 늠름히 군림하는 죽음.
커다란 체구를 위협적으로 감은 서늘한 쇠 냄새와 발자국에 들러붙는 진득한 절규와 단말마. 죽음을 감고 유혹하는 손에 이끌려 찬란한 황금색 태양 아래에서 어두운 그림자 밑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녀는 뽀얗게 웃었다.
“네, 매그너스 님.”
순교자는 폭군을 위해 기꺼이 목을 바친다, 요정의 나라로 향하는 빛가루를 눈물처럼 떨어트리며 그가 기다리는 암흑에 무릎을 꿇었다. 르네는 죽음 아래 목을 베여 그를 지배하는 구원이었고 영원한 피로 죄를 씻어 내리는 신이었다. 그 신을 붙잡아 볼을 더듬으며 그는 더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손끝에 와 닿는 희미하고 가냘픈 온기.
이것은 깊은 고독이다.
르네는 가만히 제 볼을 더듬는 손에 기대었다. 느릿하게 사랑스러운 이의 잔영을 눈 안에 담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누그러진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사랑스럽고 머리가 텅 빌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머리 아래를 모조리 잘라내면 아프지 않을까? 가슴 위쪽부터 배 아래까지 아리듯이 따끔하고 찬 공기가 오가듯이 시큰댄다. 무감각이 감각이 되어 고통으로 와 닿고 그 검은 병증은 이내 목을 헤집어 기침이 되지 못한 공기로 뇌를 두드렸다. 암흑과도 같은 색을 한 기억이 겹겹이 쌓인 유리 아래쪽에서 어둠을 비추며 녹아내렸다.
입술을 끌어올린다, 눈을 살짝 접으며 웃는 얼굴을 만든다, 언제나처럼 미소 지은 얼굴로, 언제나처럼 새까맣게 가라앉은 속으로, 르네는 가만히 웃음소리를 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까만 너울이 속에서부터 피어올라 온 내장을 썩혀 놓는다.
그러나 병이 진행된 내장을 늘어놓아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일 다 하셨어요?”
“아니, 아직.”
“위에 앉아도 돼요?”
“그러든가.”
짤막한 대화가 오간다. 르네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 품 안에 폭 들어가 안겼다. 등 뒤로 서늘한 갑주가 닿아오는 느낌에 몸을 흠칫 굳히고도 최대한 꼭 기대어 안긴다. 그 밀착이, 자그마한 장면 하나하나가, 매그너스는 지독하게 사랑스러워 입술을 꾹 깨물었다. 턱 밑으로 닿는 머리카락에서 늘 그렇듯이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안 춥냐.”
“매그너스 님을 사랑해서 괜찮아!”
“......”
퍽이나, 짤막하게 중얼이고는 머리에 입술을 묻는다.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뜨거운 온기, 간지러운 숨과 허리를 두른 두 팔. 몸 구석구석 녹아내리는 온기는 끝도 없이 부드러운데, 등에 닿는 딱딱한 무기질은 기묘할 정도로 차가워서. 르네는 그 어떤 감흥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감각 안에서, 폐를 꽉 틀어막은 눅눅한 공기를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매그너스에게는 기적이었고ㅡ르네에게는 그만큼 저주였다.
폭군에게 바치는 순교에는 얼마나 깊은 죽음이 필요했는지.
르네는 가끔은 병사했고, 가끔은 살해당했고, 아주 자주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내내 병증을 앓았고 그리고 사랑을 했고, 사랑은 합병증을 끌고 와 그녀를 몇 번이고 병사시켰다.
아무도 모른다, 알 수 없다. 눈앞에 존재하는 이가 병사의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호흡기로 공기를 걸러 삼키며 폐 속 깊이 스며든 병증의 고통으로 헐떡이고 있다는 것을. 검은 어둠 속에 목도 내놓지 못하고 잠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사랑하는 이조차도, 바로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숨을 쉬고 있는 왕조차도.
우울이라는 병증은 기묘한 것이다. 그것은 온당히 혼자만의 감당이다. 적어도 르네에게만은.
병이 생길 수 없는 몸, 그렇기에 약이 듣지 않는 몸. 악화될 수도 나아질 수도 없는 육체에 부여된 정신적인 병. 우울에 허덕이다 스스로 숨통을 끊어도, 절실한 사랑에게 심장을 끊겨 병은 지속되고 빛은 끝없이 망가진다. 그럼에도 아무도 눈치 채지 않는 것은 그가 자신을 보리라고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해요, 매그너스 님.”
“...왜 또? ...아니. ...그래, 뭐.”
떨떠름하고 조용한, 거절이 아니나 승낙도 아닌 대답. 끝없는 외줄 속에서 썩어가는 육신 속의 몸. 병사해가는 불사의 몸.
르네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사랑하는 요정은 그의 사랑은 모른 채로 새까만 빛이 되어 흐드러질 뿐이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