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방안은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웠다. 협탁에 놓인 등잔은 오래도록 기름을 넣지 않아 완전히 말라붙어, 심지마저 곧게 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옆에 자리한 작은 침대 역시 갈지 않은 침대보 사이사이로 볏짚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위에 누운 소녀는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넬리는 탁상시계에 손을 뻗었다. 두 시 십오 분. 그리고 한숨을 쉬며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도 이렇게 하루가 많이 남았다. 최근의 그녀는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도 어려웠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임무를 수행했다. 만성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연합으로서는 주어진 일을 다 하고도 더 많은 일거리를 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 과로로 쓰러진 이후부터는 아무리 다음 임무를 내려 달라고 청을 넣어도 들어 주지 않는 것이었다. 당분간 휴식하며 건강을 회복하라는 점잖은 거절만이 돌아올 따름이었다. 하여 이 방법은 끝장이 났다.
그 다음에는 연금술에 매진해 보았다. 본래 이것이 넬리의 생업이었다. 지역 주민들의 의뢰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마법사들이 자주 택하는 길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자마자 도시락을 들고 스타첼의 농장으로 향해, 해가 저물 즈음까지 가방에 수북하도록 약초를 캤다. 하도 열심히 캐다 보니 금세 가방이 꽉꽉 들어차 큰맘 먹고 가장 큰 가방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렇게 캔 약초들로 각종 포션과 비약을 제조해 시장에 내다 파니 비쌌던 가방 값을 메꾸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도 혼자 농장을 털다시피 했더니 다른 채집꾼들의 원성을 사서 스타첼로부터 반년의 농장 출입 금지령을 받아 버렸다. 그간 쌓아 둔 약초 양만도 어마어마해서 생계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결국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막혀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 나자 이제는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그간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치워 두었던 집안일이 눈에 띄었지만 도무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어야 식사를 하고, 찬장이 텅 빌 때가 되어서야 설거지를 하고, 빨래통이 가득 차 넘치기 직전이어야만 빨래를 했다. 먼지 쌓인 바닥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이마저도 그만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식기를 달그락거릴 때마다, 세제 냄새가 코를 찌를 때마다 그녀가 돌보던 거대한 성이 떠올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가 떠나온 그 남자, 매그너스가 살고 있는 폭군의 성채는.
그것은 두어 달쯤 전이었다. 벌써 몇 달인가를 홀로 쓸쓸히 성채를 지키고 있던 넬리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생각했었다.
‘이젠 매그너스를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넬리는 그를 사랑했다. 목숨을 다해, 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해냈고 그가 원하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바쳤다. 보상은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바라건대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허나 그것이 그토록 과욕인 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성채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군단장으로서의 업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간혹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도전자들이 워낙 물밀듯이 찾아오는 탓이었다. 문제는 그가 자리를 비울 때 사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넬리는 그에게 사유를 밝혀달라고 요청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만나지 못하는 나날은 자꾸만 길어져 갔다. 그는 점점 더 자주 헬리시움을 나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늦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로 만날 수 없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녀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그리움은 치명적인 아픔이었다. 하루만 얼굴을 보지 못해도 안달하던 그녀였다. 매그너스는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죽을 수도 없었다.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에게도 소중한 존재여서, 절대 말없이 그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의 믿음도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세 달이 되면서 스러져 갔다. 빛바랜 희망은 더 이상 용기를 주지 못했다.
한편 신기하게도 희망을 잃어 갈수록 반대로 그녀의 마음은 점차 편해져 갔다. 기대를 갖지 않아서일까.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역시 그녀를 이성으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게 했던 그의 암시 또한 거짓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편리하게 자신 곁에 붙들어 놓기 위한 그의 함정이었다고. 그렇게 확신하자, 이제는 정말 매그너스를 떠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던 응접실 테이블 위에 짧은 편지 하나를 남겨 놓은 채 헬리시움에 안녕을 고했다.
그것이 꼭 적절한 선택으로 여겨질 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순진하진 못했다. 언젠가는 후회할 날도 반드시 오리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르게 그날이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한 적 없었다. 또한 이토록 불타듯 괴로울 줄도 몰랐다. 더불어 가장 큰 문제는 이를 깨달은 시점이 그녀의 선택을 호락호락 돌이킬 수 있을 정도로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첫 며칠간은 곧 사라질 충격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니까. 지금까지도 잘만 살아 왔으니까. 하지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액자가 눈에 거슬렸다. 매그너스와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어색하게 카메라를 쳐다보는 두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 살풍경한 공간을 유일하게 꾸미고 있던 액자를 넬리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심장의 통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화병에 꽂아 둔 핑크 비올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슬리피우드에 파견을 나갔다가 꺾어 온 물건이었다. 당시에는 그 무뚝뚝한 매그너스가 그녀를 위해 꽃을 꺾어 왔다는 것이 마냥 기뻤지만 지금에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백 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는 그 꽃을 넬리는 벽난로에 던졌다.
허나 그렇게까지 하고도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은 계속해서 넬리의 가슴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녀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그녀는 생각처럼 쉽사리 그가 없는 일상에 녹아들 수 없었다. 그리고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볼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움에 발광하며.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짓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않고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는 잔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넬리는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쥐어짜 낸 방법들이 모두 바닥나 버렸고, 그녀는 한없이 밑으로 추락하기만 했다.
농장에 오지 말아 달라는 스타첼의 차디찬 통보를 받고 터덜터덜 귀가했던 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로 향하던 넬리는 문득 먼지 쌓인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펼쳐 놓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일기장이 보였다. 최근 몇 달간 쓰지 않았던 일기장은 과거로 갈수록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곳에 기록된 것은 그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이었다.
넬리는 일기장을 북북 찢었다. 하지만 소설책처럼 두꺼운 공책은 마음처럼 쉬이 찢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부엌 가위를 들고 왔다. 행복에 찬 글씨들이 잘려 나갔다. 방안에 어지럽게 종잇조각들이 날아다녔다. 바닥은 이미 엉망이었다. 무겁던 공책이 책등만 남아 너덜거렸다. 그제야 넬리는 가위를 내려놓았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과 철제 가윗날이 부딪쳐 뭉툭한 탁, 소리가 났다.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에 종잇조각 몇 개가 달라붙어 있었다. 갑자기 뱃속에서 울컥 치미는 토기에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채 밀려나오지 못한 신물이 목과 가슴을 따갑게 태웠다. 현기증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흐릿한 시야가 수채화처럼 번지면서 똑, 변기 수면에 눈물이 떨어졌다.
넬리는 오랫동안 울었다. 해가 움직여 서쪽으로 넘어가고, 불을 켜지 않은 집안이 완전히 새까맣게 어두워질 때까지도 그녀는 메마른 욕실 바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던 그녀의 노력은, 그렇게 끝이 났다.
후회하지 않으려 했다. 마법을 배운 것도, 고향을 떠난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껏 직접 내려 온 결정들 중 돌이키고 싶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랬던 넬리에게 생전 처음으로 인정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었다. 그를 떠나서는 안 되었다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프고 괴로웠다.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단단한 받침대가 있었다. 그녀는 언제고 그의 집, 아름다운 헬리시움 성에서 매그너스의 흔적을 좇을 수 있었다. 원한다면 그곳에서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 숨을 거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위안이 금지된 지금, 그녀에게 남은 기쁨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추억조차 그녀에겐 사치였다.
찬바람이 휭 불어 누워 있는 넬리의 앞머리를 쓸었다. 창문을 열어 두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창문을 닫기 위해 느릿느릿 일어났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와중에 고작 추위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이 이상 그 어떠한 쓰라림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숨을 끊지 못하는 거겠지.’
더는 미래를 원하지 않았다. 허나 아픔은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조차 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돌아가면 되잖아.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보고프면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 돼.’
돌아갈 수 없어. 창가에 선 넬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에 파고들었다.
‘돌아가면, 돌아가면 난…’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눈물이 까맣게 때 낀 창틀에 방울져 내려 얼룩을 만들었다. 파르르 경련하는 입술 사이로 작게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매그너스는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넬리는 진작에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외면했다. 그녀 자신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애정을 바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원하지도 않는 연심을 자꾸만 입에 올리며 귀찮게 치근덕대는 그녀를, 그는 왜인지 받아 주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거기서 만족했어야만 했다.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도 모른 채, 오지 않은 밤을 세며 응어리를 새겼다.
‘그러니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그는 자신을 경멸할 것이다. 넬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서러워하고, 혼자 원망하며 떠나 버린 그녀였다. 만에 하나 그가 그녀의 사랑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었더라도 이제는 아닐 것이었다. 또한 혹여, 필시 그런 적은 없었겠지만, 정말로 행여나 매그너스 역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연정을 품었다면…
‘그 상처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만약 진실로 그러했다면, 그녀는 가장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이에게 슬픔을 준 최악의 여인인 것이다.
한참을 서서 창틀에 머리를 대고 울던 넬리의 목덜미를 찬바람이 다시금 훑었다. 오싹 소름이 돋으며 그녀는 아직 창문을 닫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름을 칠하지 않아 뻑뻑한 창문을 겨우 힘주어 닫은 뒤, 넬리는 도로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실컷 울고 났으니 이제 잘 시간이었다. 달리 할 일이 없는 그녀에게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아무런 노력 없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 때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별 이후 잠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본디 낮잠을 거의 자지 않던 평소의 습관을 고려하면 몹시 의아한 일이었다. 근래 넬리의 일상은 수면과 식사, 또는 목욕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그중 대부분은 수면 시간이 채우고 있었다.
눕자마자 저항하기 어려운 졸음이 몰려왔다. 운이 좋다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꿈은 언제나 즐거웠다. 적어도 꾸는 동안에는 그러했다. 이전처럼 그의 곁에서 미소 짓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조잘거릴 수 있으니까. 게다가 아주, 아주 가끔은 그에게서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 행운이 그녀의 손 안에 자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넬리는 눈을 감았다. 다시는 뜨는 일이 없기를 오늘도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