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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운명지어져, 내게 넋을 잃은, 근사하고 강한 사람, 용맹하고 비겁한 사람. 정신을 죽음에 바친 사람. 마음을 죽음에 바친 사람. 트리스탄 경.”

   히데코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당초부터 읽기 위해 빼 든 책이 아니었으나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책장에 다시 꽂지는 않은 채 다만 소파에 기대앉아 이마를 짚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서술은 언제나 그녀가 느끼기로 수다스러웠고 경박하게 느껴졌다. 그녀 자신이 사랑을 직감했음을 느꼈을 때 어떠했던가. 그 감정만으로도 가슴이 뿌듯이 들어차고 버거워 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사랑의 서술을 차마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히데코는 잠자코 손을 내려 명치 언저리를 쓸어보았다. 손으로 쓸어본 곳이 담처럼 불쾌하고 덧없이 버거웠다.

   사랑은 말릴수록 타오르는 감정이라고, 그가 그렇게도 즐겨 읽던 희곡의 작가가 했다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떠오른 말은 그 떠올랐다는 단어와도 같아, 다만 망령처럼 자신의 곁에서 끊임없이 감정을 상기시킬 따름이었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작가들의 원형 심상과도 같았음인지. 히데코는 제 손에 들린 책이 그 말과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 도망친 곳에서 서로의 사이에 칼을 두고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그는 어린 시절 어떻게 받아들여서, 아직도 책장에 꽂아두고서 자주 들여다보고 있는지. 그가 살아 숨 쉬었던 스무 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듯한 책등을 쓸어보며 히데코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것을 두고 그는 그 어린 시절, 혹은 스무 살의 청년 시절 혹여라도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었을까. 그녀는 그와 같은 생을 지나본 일이 없었으므로 짐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그 말은 곧 장애물이 있을 때에야 사랑은 유지되는 것이라는 것으로 느껴졌다.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으나 틀리지는 않을 것이었고 최소한 그녀 자신에게는 해당되는 말이었다.

   “책 읽고 있었어요?”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음성과 함께 음성만큼이나 부드러운 포옹이 닿아오자 히데코는 잠자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던 히데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가만 웃으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시즈쿠.”

   살그머니 그녀와 마주 웃고 난 시즈쿠는 이내 히데코의 곁에 앉더니 고개를 앞으로 빼 그녀가 들고 있는 책 표지를 건너다보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네요.”

   히데코는 대답지 않고 다시금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트리스탄 경보다는 파르치팔 경을 더 좋아하지만 읽는 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더 좋긴 해요, 우리 이거 오페라로도 보러 갔었죠, 아마 지난 달이었나? 그러지 않았어요? 히데코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뺨을 대고 중얼중얼 새어 나오는 시즈쿠의 말에 히데코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시즈쿠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여성의 그것만큼이나 올이 가늘어 부드러운 고수머리가 손가락 새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새어나오는 것은 이미 익숙한 감촉이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 있어 다소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의무적으로 쓸어넘긴 손길이었음에도 그는 느끼지 못했는지. 예의 그 익숙한 소년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제 어깨에 뺨을 부비는 시즈쿠를 내려다보는 동안 히데코는 몇 번인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몇 년간 있어 온 일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이 없음에도 나태해지는 기분이 들 수 있을까. 차라리 누군가 한 명이 변했더라면 납득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저 내 감정이 소진되었을 뿐인 것을. 당신은 내가 느낀 것을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 새카맣고 검은 저택에 갇혀 지냈을 때, 나는 내 결말을 정해두고 살았음을. 살아 숨 쉬는 현실의 인물이 아닌 작품 속의 인물인 양 죽음으로 맺어지는 결말을 당초부터 정해놓고 살았던 것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설령 그때 눈치챘다 한들 내가 이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한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되살아난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남들 같은 평범한 일상이란 것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으므로 동경하고 바라던 것임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 언저리에서 깨달았고 아마 나는 그 때부터 어쩌면 초조해졌을는지도 몰랐다. 당신에 대한 감정이 소진되기 시작하던 것은 그 때부터였겠지. 지금까지 몇 년을 천천히, 유예기간을 삼듯 아주 천천히 소진되어 흘러가던 감정을 당신은 지극하게도 아끼고…… 나는 내가 얻은 일상이 아주 기쁘지 못했고 초조했다. 내가 평생을 보냈던 저택에서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을 알았으므로 그 초조함은 바닥도 천장도 없었고, 그랬기에 더욱 초조했다. 누군가 한 명은 알아주겠지, 혹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최소한 가장 음침한 비극은 되겠지, 당신이 읽어온 쉴러의 그 어떤 비극보다도 비참한 비극적이고 장중한 결말을 맞아야 하는데. 당신이 저택에서 함께 나가자고 말했을 때 나는 은연중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초조해질 무렵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낭독연이 끝나고 후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올 때의 반복되는 적막함이었다. 앞으로는 끝을 가늠하지 못할 지루한 일상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예견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생각나는데, 우리 오늘 저녁에 오페라 보러 갈래요?”

   시즈쿠가 히데코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고 묻자 히데코는 은연한 웃음을 머금은 채 그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웃음기에 흠뻑 젖은 시선을 마주하다 이내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천천히 시간을 들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내가 당신을 가장 사랑하던 그 순간에 죽어버릴걸.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고 마르기 전에, 더 이상 당신을 덜 사랑하기 전에 죽어버렸으면 했다. 내가 그 때 죽었더라면 차라리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당신을 아직은 사랑해서, 그마저도 아직 너무도 사랑해서 죽고 싶었다.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당신에게 주었던 사랑이 너무 커서 그랬을까. 무슨 말인지 당신은 알까. 모르겠지, 모를 테지. 나는 당신이 내 음습함을 모르기를 바랐다.

   “오늘은 별로 내키지가 않네요.”

   시즈쿠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동안 히데코의 어깨에 턱을 묻은 채 미간을 좁히고 눈망울을 굴리던 시즈쿠가 다시 히데코를 바라보았다.

   “요 몇 주 내내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았잖아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에요. 달싹이는 그의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히데코는 쓴웃음이 역하게 밀려 올라오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내리눌렀다. 몇 번이나 했던 변명임은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시즈쿠의 얼굴은 수심에 잠기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익히 알고 있었다. 얼마나 간절하게 당신을 바랐고, 얼마나 애틋하게 당신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뺨을 쓸어주고 싶었는지 생각이 날 때면, ……. 히데코는 머릿속에서 방점으로 말을 흐리며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걱정에 잠겨 있던 시즈쿠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흘러나온 말은 아마 마음에 한가득 담아두고 있을 걱정 대신 다른 말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지요. 어디 안 나가고 당신 옆에 있을게요.”

   그런 말이 나오리라는 사실도 이미 지겨우리만큼 알고 있었다. 히데코는 천천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걱정도 마음대로 입밖으로 내보내지 못하는 그의 성미는 이미 익숙한 그 무엇이었고 자신이 저당잡을 것에 지나지 않는 듯싶었다. 히데코는 잠시 시즈쿠를 바라보다, 그가 좀 더 편하게 기대앉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고는 다시 책을 열었다. 그가 머리를 기댄 어깨너머로 책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금세 흥미에 젖은 것처럼 깊은 숨이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자 히데코는 조심스럽게 책장에서 시선을 떼고 힐끗 시즈쿠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더 이상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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