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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렝쥬/레이쥬]

 

 

* [BGM : Say Something] 함께 하시면 더 좋습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소란스러운 사람들 말소리가 바깥세상은 대낮임을 알려주고 있지만, 레이지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치울 생각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관계란 유한하고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도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자신은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이라 더 그랬다.

 

 

  ‘헤어지자.’

 

 

  그 한 마디가 머릿속을 맴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질 않아서 짜증이 치밀 지경이다. 자신은 감정 조절을 잘한다고, 힘든 내색 하지 않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지가 언제던가.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그런 오만에 어깨를 펴고 살았다. 괜찮다고, 그녀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다가올 불행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자신은 늘 이런 식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이 뭘 잘 못 했는지. 아니, 잘 못 한 게 있기는 한 건지. 레이지는 그저 투정을 부렸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주제넘은 일이었던가? 쥬에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이별을 고했다. 짜증스럽게 주먹을 쥐었다가, 무릎을 끌어안았다가,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레이지는 그 날의 새벽을 회상했다.

 

 

-

 

 

  “쥬쨩, 말 좀 해봐.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연기 경력은 헛것이 아니라,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사랑에 버림받은 사람의 표정으로 쥬에를 바라보는 레이지는 ‘뭐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쥬에의 반응은 레이지로서는 예상치 못한 것으로, 그녀는 당황하며 재빠르게 대답하고는 잠시 입술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그게 아니잖아.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내가 널 포기하려고 하잖아,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해 봐….”

 

 

  단호한 거부의 말. 레이지가 건넨 ‘무엇이든’ 이라는 말은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으니까. 쥬에의 안식처가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는 자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레이지가 애원할수록 쥬에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쥬에는 움찔하고는 굳더니, 아까부터 계속 피해온 레이지의 시선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는 있었는데….”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지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해선 안 될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은 물과 같아 뱉고 나면 무를 수 없었다. 그것은 쥬에의 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하는 불안함에 쥬에의 말을 끊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더 빨랐다.

 

 

  “당신도 나를 포기할 때가 온 거지. 여태까지 고마웠어. 이제 그만 하자.”

 

 

  레이지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어안이 벙벙하여 몇 초간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보는 동안 쥬에는 차분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까까지 그와의 대화를 완강히 거부하던 쥬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피하던 조금 전과 비교하면 오히려 지금이 더 편안해 보였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체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편안함이 그녀의 얼굴에 비쳐 보였다. 어째서? 레이지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쥬쨩,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들었잖아. 헤어지자.”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헤어질 때가 된 것뿐이야. 당신이 내게 질리는 순간.”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어있는 레이지를 두고 쥬에는 떠났다.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오피스텔의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쥬에가 앉아있던 침대가 언제부터 회색이었지? 벽지는? 공기는? 한 순간에 세상이 어둠에 먹혀버렸다.

 

 

-

 

 

  그렇게 쥬에가 떠난 뒤로 레이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회색 공간에 먹힌 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오늘 스케줄을 전부 취소했다. 핑계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레이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자꾸만 쥬에의 헤어지자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레이지는 이런 일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녀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을 듯 몸을 낮추고 애원했다. 쥬에는, 레이지가 지극히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존심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레이지는 그저 잘 해보고 싶었다. 레이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레이지보다 화내면서 대신 싸우고, 가장 낮은 위치를 자처하며 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를 위해 레이지도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쥬에는 레이지가 떠나보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쥬에는 자신이 그녀에게 질렸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떻게 질릴 수가 있는가? 그랬다면 이렇게 괴롭고 힘들지도, 눈물이 멍울처럼 맺혀 가슴을 꽉 틀어막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가 사랑에 빠지게 만든 것은 그녀였으면서, 이렇게 아프게 만든 것도 그녀다. 이것이 절망일까? 레이지는 사라진 친구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가 떠날 때 울고 있었나?

 

  레이지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른다. 발도 넓고 일터에서 능숙하며 분위기를 이끄는 솜씨가 훌륭하다고 쥬에가 칭찬했던가. 그녀야말로 레이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레이지는 자신이 항상 서툴다고 느꼈다. 쥬에 앞에 설 때면 더 그랬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방법은 가장 어려운 주제였다. 그 날 쥬에가 떠나가게 두지 말고 붙들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작고 초라한 사람이라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나를 받아들여 줄 때까지 어디든 따라갈 테니 떠나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레이지는 또 두 눈 뜨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헤어지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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