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 이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처럼 비가 며칠재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가 매섭게 땅으로 내려 꽂히고 있던 날이었지. 2000년이라는 시간을 살면서 이렇게 비가 많이내리는 것은 처음 보는것만 같았다. 잠시 새벽에 비가 그치나 했더니, 태양이 뜨기 전보다 먼저 시작한 비는 5월이라는 이 봄날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고, 햇빛 한 줄기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처럼 먹구름이 하늘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엄청 쏟아지네."
"그러게 말임다. 비가 이렇게 와서는 백성들이 힘들어할검다!"
금발의 긴 머리를 가진 남자가 창밖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한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르뮤트 웜테일, 북쪽의 마왕.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이름과 직책이었다. 그가 조용하던 이 분위기를 살짝 비틀자 이 때다 싶어 그의 보좌관인 란이 말을 이었지만, 곧 시선은 서류로 향하고 말소리는 사라졌다. 사각거리며 만년필과 종이가 마찰하는 소리, 거센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벗 삼아. 아스라이 책상 위를 비추고 있는 촛불에 의지해 서류에 유려한 필체로 싸인을 해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눈이 파오는 것인지 남자는 펜을 내려놓고 두 눈을 꾹 감았다.
「베르!」
눈을 감자마자 눈앞에 나타나는 분홍빛 머리칼.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던 자신의 연인이자, 북쪽 최초로 마족이 아니라 인간인 왕비 셰린 루. 그녀의 미소와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자 베르뮤트가 순간 눈을 번쩍하고 떴다. 그와 동시에 책상을 건드려버린것인지 옆에 놓여있던 잉크병이 바닥으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버건디색의 카펫을 하늘보다 더 검은 색으로 물들여버렸다. 셰린 루- 아니, 이제는 셰린 웜테일이라는 베르뮤트의 성을 따른 그녀의 이름으로 기록에 남을 그녀. 그녀가 베르뮤트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탓일것이다.
"마왕. 괜찮슴까? 표정이 좋지 않슴다."
"아아- 날씨가 이러니 그렇게 보이는게 아닐까. 잡담 할 시간에 어서 서류나 처리하도록."
"알겠슴다.."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고개를 젓다가 내려두었던 만년필을 다시 집어들었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품 안에 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머리는 알지만, 마음은 그것을 부정하고 부정해 아직도 눈을 감으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눈 앞에 나타나 줄것만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웠던 미소를 계속 눈 앞에 떠올리게 해 괴롭게 하려는 못된 마음의 술수. 이 세계에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정확히 말 하자면 살아서 존재하지 않는 그녀가 계속 눈 앞에 떠오른다.
한번 떠오른 셰린의 모습은 좀처럼 지워지려고 하지 않았다. 천천히 머릿속을 뒤덮어오는 제 작은 신부의 얼굴, 미소. 그리고 제 품에 안겼을때의 느낌과 코 끝에 스치던 달달한 복숭아 향. 그 모든것이 베르뮤트를 서서히 덮쳐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있는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이 마계에 도달했을때의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지. '마왕을 물리치러 온 전설의 용사' 라는 우스운 별칭을 앞에 달고 마왕의 변덕으로 오게 된 마계. 작은 인간 여자에게는 너무하고, 자비가 없는 세상. 처음 보는 사람들과 결혼을 해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이라는 말에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럼 죽이라며 소리쳤다. 피식하고 서류에 싸인을 하고있던 베르뮤트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 셰린은 지금까지 본 여자들같지 않았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걸까.
그때는 단순히 호기심과, 지금까지 품에 안은 여자들은 많았지만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기에 눈길이 갔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분방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 사방의 마왕들 중 가장 자비가 없기로 알려진 마왕. 그런 그였기에 그런 여자따위 금새 질려 내칠것이라고 세간은 떠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고 차갑고 얼어있던 북쪽에는 따뜻한 기온이 돌아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여자 하나로 시작된 봄은, 그 여자로 인해서 다시 겨울이 찾아왔지.
「베르뮤트! 이거 봐요. 정말 예쁘지 않아요?」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요. 같이 산책가지 않을래요?」
「어서- 어서 일어나요! 마왕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게을러서 되나 몰라 정말!」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울린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가, 때로는 잔소리를 하던 목소리가, 웃음소리가. 지독히 선명하게 귓가에 울려퍼진다. 그녀와의 만남, 그리고 이별. 웃음으로 시작된 기억은 눈물로 끝나는 기억이 되어있었다. 피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시작된 기억의 회상과 펜의 움직인은 곧 고요함과 함께 멈추었고, 흐르지 않는 눈물을 마음 속으로 닦아내는 그였다.
* * *
어느덧 날짜가 다음날로 바뀌었다. 집무실의 시계가 날이 바뀐것을 알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 맞은편 책상에 앉아 책상에 머리를 부딪힐듯 꾸벅거리며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이는 보좌관이 불쌍했던 모양일까. 서류에 싸인을 하던 손을 멈추고 그에게 이만 정리하자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대로 고개를 꾸벅하며 이동마법으로 제 방에 돌아가는 보좌관을 보며 자신도 제 방으로 위치를 옮겼다.
방으로 돌아와 위스키를 한잔, 두잔 들이켰다. 독한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때마다 몽롱해지는 정신. 모든것이 점차 흐리게 보이기 시작하는건 눈에 차오르는 눈물때문인것일까, 술기운 때문인것일까. 그 와중에 존재할리 없는 셰린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 앞에 나타난다. 아직도 창 밖에는 비가 미친듯이 내리고 있었고, 그치려고 하지 않았더랬다.
"... 셰린."
마족과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0년, 20년. 몇십년이 지나도 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자신과는 다르게 1년이라는 작은 시간 하나에도 금새 모습이 바뀌어 갈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것. 물론 알고있었다. 그렇기에 언제든 자신의 신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하지만 행복한 시간에 푹 젖어버려 그것들을 모조리다 잊어버린 자신의 탓이었을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차가운 손길에 그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행복함에 젖어있는 그 시간에 오랫동안 빠져있다가 그들에게 신이 더 이상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을 때 그때 떠나간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홍색 꽃이 필 즈음 찾아온 그녀는 그 꽃이 질때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침대에 들어가버린 그녀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고, 옅은 웃음만 그에게 보여줄 뿐이었다. 마법으로도, 마계의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셰린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무엇이는 해 주겠다고 했던 자신은 어디로 갔던가. 끝까지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은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것이 되어있었다. 권력도, 마법도 그 무슨 소용일까. 자신의 앞에서는 웃고있다가 그가 눈 앞에 없을때 고통에 눈물 흘리던 그녀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던 무력한 자신을 기억한다.
"나의, 신부님."
술이 넘어갈때마다 선명해지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술기운에 달아오른 체온이 마치 제 신부가 꼭 안아주는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시려온다. 눈을 깜빡여도 선명하게 서 있는 모습에 왈칵, 하고 눈물이 쏟아지려고 눈가에 고여버렸다.
-이런... 셰린. 그렇게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린다니까. 이리 와. 머리 말려줄까?
-난 비오는날이 좋은걸요. 이런적 한두번도 아닌데 왜 그리 새삼스럽게!
-하하, 못말린다니까.
비 오는 날을 유난히도 좋아해 비가 올때마다 시녀들의 눈을 피해 비 오는 정원을 걷다가 돌아오고는 했지. 그럴때마다 시녀들에게 잔소리를 듣는일이 빈번했지만 그래도 비가 좋다면서 항상 비를 마즈러 나가고는 했던 여인. 셰린이 좋아했던 비는 그녀가 죽은 후 며칠이나 미친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날'. 가쁘던 숨이 멈추고, 진분홍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영영 감춰져버렸던 날 이후로 계속해서.
"나의 신부님, 나의 레이디..."
침대에 쓰러져 팔을 뻗었지만 제 품에 들어오는 작은 몸이 없다. 지금이라도 이름을 부르면 "불렀어요?" 라며 총총 달려와 안길것만 같은데. 눈 앞에 나타난 허상을 아무리 끌어안아봤자 품은 채워지지 않았다. 비어버린 품이 너무나도 쓰리고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다. 셰린을 만나기 전에는 이 여자 저 여자. 하룻밤만 품었는데. 그런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기 때문일까.
그래, 다를 수 밖에. 그녀는 제가 이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한 사람이었으니까.
일어나려하지 않는 몸을 일으켜 서쪽에서 가져 온 꽃을 집어들었다. 꽃을 좋아하는 서쪽의 마왕 코르네에게서 가져온 '빗방울의 꽃'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탈해 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괴로운 기억을 지워준다고 하는 꽃. 셰린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쪽에서 이 꽃을 가져온 것이었다. 코르네는 끝까지 베르뮤트가 이 꽃을 가져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 그리고 자비가 없다고 하던 북쪽의 마왕의 눈물 때문일까. 결국에는 꽃을 내어주고 말았지.
희고 아름다운 꽃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렇게 보면 괴로운 기억을 지워준다는 참 좋은 효능이 있고 아름다운 꽃이지만 계속 이 꽃의 향을 맡다보다는 괴로운 기억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잃어버리게 되는 무서운 꽃이었다.
마치, 자신의 신부처럼. 작은 여자는 살포시 내려와 자신을 이렇게도 망쳐두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고 뛰기 시작한 심장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을 했을까. 사랑하는 여자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만 했다. 죽었다니, 없어졌다니. 믿고싶지 않아서.
-아니야. 죽지 않았어!
-진정해라 베르뮤트. 너의 반려는... 죽었다.
-입 닥쳐... 아냐!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언제였더라. 손에 쥐여진 꽃의 향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화를 냈던 기억이 사라진다.
또 다시한번 향을 맡는다. 셰린이 아파하던 모습이 지워진다.
또, 또. 두번, 세번 반복해서 계속 향을 맡자 제 작은 신부님이 아파하던 모습도, 힘 없이 침대에 누워있던 모습도 모두 다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 모든것은 잠에서 깨고나면 다시 찾아올 현실이었지만, 그는 그 날 이후로 이 꽃의 향을 맡지 않으면 잠들수가 없었다. 독한 위스키의 도움을 받아도 소용이 없었지.
"셰린..."
작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꽃의 향을 맡자 제 눈앞에 아름다웠던, 아니 아름다운 신부가 품에 안겼다. 오늘도 그는 자신의 신부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신부를 그리며 오늘도 잠에 빠져 들 것이다. 다음 날 눈을 떴을때 사라져버린 자신의 반려를. 주륵 하고 눈물이 다시한번 눈가에서 뺨으로 내려왔고, 그의 눈은 스르륵 감겼다.
그가 잠든 후에도 비는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내려왔다. 저 비는 베르뮤트의 눈물을 감추기 위한것인지 아니면 그를 보며 흘리는 셰린의 눈물인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