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 합작
*구운몽~ 어느 소녀의 사랑이야기/ 백란 드림
*백란 흉몽 네타가 있습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다. 시간은 올바른 흐름을 따라 지나가고, 계절은 시간을 따라 모습을 갖춘다. 오늘은 정말로 이상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뒤로 주변의 모든 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화려하지만 기품 있게 꾸민 방. 평소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하인들의 모습. 거기다 자신을 피하는 모습까지 보이니 말이다. 백란은 눈치를 보며 피해 가는 하인을 잡고서 예의 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있지, 왜 다들 절 피하는 거예요?”
내가 무얼 잘못했나? 하며 덧붙인 말은 설마. 하는 조바심도 담겨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누나를 본 적이 없어. 내가 느낀 위화감은 여기서 생긴 건가? 하인은 혼자 중얼거리는 백란에게 고개만 꾸벅 숙이고 서둘러 뒷걸음질 쳤다. 이상했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하인의 모습도, 텅 비어 아무도 없는 복도도. 평소 이 시간이면 누나는 방에 나와서 산책로를 걷거나 주방에서 괜찮다며 말리는 하인들을 거들어 도우고 있을 때다. 하지만 자주 걷던 길, 주방, 심지어 방에도 없었다. 왜지? 어딜 나간다면 꼭 내게 말하고 나갔을 텐데. 백란은 소여의 방으로 찾아가 문 앞에 오랫동안 서서 고민하였다. 소여는 밖에 아는 사람도 얼마 없다. 심심하면 산책이나 수를 놓는 등 혼자서 무료함을 달래는 편이였고 그마저도 잠으로 때웠다.
“저어.. 도련님. 월 도련님께서 찾으십니다.”
“형이? 형이 왔어요?”
분명 내일 온다 했는데. 귀띔을 해준 날에 꼭 맞춰오는 월이 하루 일찍 도착하였다는 소식은 백란이 느끼고 있는 기시감을 더 쌓아주기 충분했다. 소식을 전한 하인은 이를 아는 건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백란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백란이 자경국에서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 하염없이 한 사람을 찾는데, 낙양의 보석이 찾고 계신 이 귀한 분은 이제 세상에 없단다. 떠났단다. 독한 고문을 받고, 목소리와 다리를 잃고. 저승을 헤맨다던데. 낙양성을 둘러싸고, 그 둘째 도련님을 둘러쌓아선 세간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본인이 들으면 울며 소리칠 소문은 월에게도 금방 들려왔다. 작은데도 어디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제게도 틱틱거리며 백란이를 감싸던 애가 죽다니. 둘이서 자경국으로 놀러 간다는 말을 월은 믿지 않았다. 직접 업으며 예뻐한 동생이다. 거짓말은 훤히 꿰고 있었고 별일 아닐 거라며, 잘 다녀오라며 배웅까지 해주었는데. 옆에서 동생을 챙기고 연인이던 아이가 죽어선 혼자 돌아왔단다. 걱정되어 찾아온 월은 기별을 넣은 날보다 하루 일찍 성으로 향했다. 혹여 허튼 생각은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사람이 많은 장거리로 나와 걷는데 둘, 셋씩 모여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모두 똑같은 이야기였다.
‘백란 도련님과 그 아씨 소문 들었나?’
‘지금 쫙 깔린 이야기를 누가 모르냐, 이 사람아!’
‘불쌍해서 어쩌누, 혼례를 올린다 하지 않았었나?’
‘영주님도 돌아오는 길로 올려준다 하셨다는데 안됐구려.’
‘자경국은 뭔 일이라고 애먼 사람을 죽여?’
정말 죽은 건가? 며칠 전만 해도 얼굴 좀 비추라 잔소리한 아이가? 월은 발을 재촉하여 성으로 입궁했다. 하인에게 안내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활짝 웃으며 맞이하는 백란이 보였다. 똑같은 얼굴, 웃음, 어투까지 모두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소문은 역시 거짓인가.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쉬고 있는 게 아닌가. 월은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입을 열어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응! 형은? 웬일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돌아오고선 네가 연락이 없으니 직접 왔지. 그 아가씨는?”
“응? 누나? 그게 말이야~. 요즘 누나가 자꾸 안 보인다? 내가 뭐 잘못했나?”
백란의 대답에 월이 멈칫했다. 눈만 돌려 뒤의 하인에게 바라보니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는 게 성으로 오며 세운 가설에 확답을 주었다. 더불어 낙양에 퍼진 소문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는 사실도. 침착하게 다시 눈을 돌려 백란을 살펴보자 월은 동생이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걸, 애써 알고 있는 답을 미루어 치워두고는 자기 멋대로 생각하며 처한 현실을 기피하고 있는 구석을 발견했다. 어쩌다 이리 변을 당한 게야. 꼭 붙어서 지켜주다던 그 약조는 어디 가고 이리 애를 몰아넣어. 월은 속으로 책망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그저 백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잘못했겠지. 적어도 쓸데없이 사람 걱정은 안 시키는 아가씨잖아.”
“그런가? 그렇지만 잡히는 일이 없는 걸.”
월의 포장된 위로에 백란이 우물거리며 무엇을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월은 그런 동생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허황된 꿈을 꾸게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바로잡아 눈을 뜨게 해야 하는 걸까. 후자일 경우 자칫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수 있다. 아니 무너질 것이다. 월은 확신을 하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둘째 도련님과 앞에서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긴 첫째 도련님. 하인들은 아연 자실하며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이 돌아올 수 없으면 잊어야 한다. 산 사람은 산 사람이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자연스러운 이치를 대입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저 시간이 약이라 생각하며 눈을 내리깐 하인들은 방금 막 입궐한 병사를 백란과 월에게 안내했다.
“백란 님, 자경국에서 백란 님께 온 서신입니다.”
“내게? 무슨 일이지?”
거기서 크게 사고 친 건 하나뿐인데. 불안한 표정으로 화려한 무늬가 수 놓인 천을 펼치자 안에서 붉은 깃 귀걸이가 나왔다. 또 내용이 적힌 쪽지의 안에선 피 묻은 붉은 비녀까지. 미쳤군. 월은 짓이기며 백란의 손에 든 서신을 뺏어들었다. 내용은 뻔했다. 놓고 간 물건은 챙겨가라는 친절한 서신. 아주 곱게 둘러 보냈군, 그래. 기가 차 서신을 찢으려는 월은 그보다 급한 백란을 바라봤다.
눈은 들고 있는 귀걸이와 비녀에게 고정된 채 초점이 맞지 않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바들바들 떨며 귀걸이의 깃과 날카로운 비녀를 끌어안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결국 쓰러졌다. 하인들이 놀라 부축하고 방으로 옮기기까지 월은 뒤를 따라가며 걱정스레 바라볼 뿐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착잡하게 돌아갔다. 찢지 못한 서신만 백란의 방에 두고 나올 뿐.
‘이게 왜 거기서 와요? 누나 잠깐 나간 거 아니었어요?‘
‘응, 아니야.’
‘그럼 어디 있는 거예요? 며칠 전부터 보이지도 않고.. 내가 싫어요? 또 두고 가는 거야?’
‘내가 어디 있는지 잘 알잖아? 어리광 피우지 말고.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그럼? 전 누나 없이 혼자 살라고?’
끄덕이며 슬며시 웃음을 보여준 소여는 이내 물보라에 휩쓸리듯 물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자경국에서 밀서를 빼오다 수가 틀려 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던 소여는 해랑의 도움으로 다리 하나와 목소리만을 잃고서 동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잠들었다. 꿈은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보여주는 데. 물의 왕족들은 5년 동안 힘을 축적하여 딱 한번 꿈과 꿈을 연결해 한 사람이 원하는 꿈으로 찾아들어 갈 수 있다. 평범한 인간부터 다른 세계에 사는 꿈을 꾸는 모든 이에게, 인간들은 모르는 이야기지만. 바다에선 오래전부터 잊지 못하는 사람의 꿈에 찾아들어가 이처럼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며 알려졌다. 소여 역시 마찬가지로.
꿈은 꿈으로 이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소여는 백란의 걱정을 덜기 위해 왼쪽의 다친 다리도, 목소리도. 원체 잃어버린 두 가지를 갖추고 백란의 꿈에 찾아갔을 뿐. 동해 깊숙이, 아주 밑에 위치한 용궁에서 꿈에서 깨어 여리게 눈을 뜨고 창문을 바라보는 소여는 다시는 육지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 목숨도 간신히 구했는데 다시 올라가겠다면 왕정이 크게 흔들릴 테니까. 5년에 한번 씩 꿈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 이걸로 위안 삼으며 부디 백란의 안녕을 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