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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소재주의.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전서 15:52)

 

 

 

오래 된 책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

책상에 엎어져서 잠들었던 사에키는 눈을 뜨기 무섭게 코끝에 감겨오는 익숙한 냄새에 잠깐 숨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지.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자 누렇게 바랜 종이와 옅은 색의 글씨가 자신을 반겼다. 두꺼운 가죽표지와 새까만 가름끈이 달린 낡은 서적. 특무실 도서관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이 책엔 서양종교의 교리가 적혀있었다.

‘요즘 얼굴색이 안 좋구나.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제게 이 책을 권한 사이토는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왔었다. 아마도 피아노를 치다 말고 자꾸만 손이 멈추는 제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겠지. 사에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시선을 피했고, 사이토는 소리 없이 웃더니 슬며시 성경을 내밀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땐 몰두할 것이 생기면 나아지지. 피아노도 손에 안 잡힌다면, 그걸 읽어보렴.”

 

‘감사합니다.’ 진심이라기 보단 의례적인 감사인사를 한 사에키는 그날 이후 마음이 복잡할 때면 피아노보단 책에 손을 뻗었다. 엉망인 마음으로 연주하는 선율은 누구도 위로해 주지 못한다. 바보 같은 소리를 뽑아내는 자신도 비참해지고, 우연히 그걸 듣게 될 누군가의 기분도 망쳐버리지. 그에 비해 책은 참으로 좋다. 소리 없이 눈으로 읽기만 하면, 혼자서 조용히 무너지거나 일어서거나 하니까.

 

‘몇 시지?’

 

오늘은 글렀다. 성경의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도서관에 가득한 종이냄새에 취해 잠만 잤으니까. 새벽에 임무도 나가야 하는데, 자신은 오늘 뭘 한 걸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함에 그는 창밖으로 향했다.

도서관의 커다란 창문을 가리는 커튼을 걷자,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진다. 누구든 시선을 빼앗길만한 절경이지만, 그의 시선은 별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아.”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림자가 낯익다. 사에키는 마치 불길에 이끌리는 날벌레같이 앞뜰을 걷는 인영에 온 오감이 집중되었다. 어둠속에서도 선명한 흑발. 새벽을 닮은 눈동자. 불빛 하나 없는 밤인데 어찌도 그리 빛나는지, 친애하는 동료는 오늘도 환하게 웃으며 주변에 빛을 흩뿌린다. 마치 여행자를 이끄는 북극성 같이, 암흑속의 촛불같이.

사에키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제 마음 속 우울함은 맥을 못 추고 안쪽으로 숨어든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좋은데, 다가가 말이라도 건다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제가 어째서 우울함 속에서 허덕이는지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제 빛나는 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성인다.

 

“어이, 슬슬 들어가지 않으면 내일 못 일어난다.”

 

앞장서 나가는 그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하는 타가미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 빛에 다가간다.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행하는 그의 몸짓에는 경외도 존경도 없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그녀는, 그런 타가미를 조금도 나무라지 않는다.

 

“알고 있어요! 금방 들어갈 거니까, 걱정 마!”

“춥지도 않냐. 하여간.”

“어라? 타가미, 추워? 어디 봐요!”

“난 괜찮다만.”

 

거리낌 없는 대화. 상냥한 얼굴로 다가가 손목과 뺨의 온도를 체크하는 몸짓. 애정 가득한 그녀의 행동에 사에키는 결국 두 눈을 질끈 감고 커튼을 닫았다. ‘에노키.’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듯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단정한 머리를 헝클이며, 아까 제가 본 것을 다 잊어버리려는 듯 몸부림치던 그는 눈앞에 놓인 성경 구절을 중얼중얼 읽어 내려갔다.

이런다고 제 질투가, 제 우울함이 사라질까.

확신 할 수도 없지만 이러고 있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머릿속이 자꾸 나쁜 생각으로 가득 차오르기 때문이겠지. 사에키는 사이좋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머릿속을 문장으로 가득 채웠다. 믿지도 않고, 실체를 보지도 못한 신에 대한 문구로. 한 가득, 넘칠 듯이. 머릿속이, 터져버릴 때 까지….

 

 

 

 

 

질투심이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더없이 하찮아 보이지만, 직접 겪는 순간 온 몸을 썩게 만드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사에키는 제 질투심이 자신을 바깥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있다는 걸 빠르게 알아챘고, 자신이 완전히 붕괴하는 걸 막기 위해 제 마음을 통제했다.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을 때 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식사 중 자꾸 그녀의 옆에 누가 다가오나 확인할 때 까지도 괜찮았고, 그 목소리가 누구를 얼마나 부르는 지를 세고 있었을 때 까지도 괜찮았다.

그의 질투가, 그의 우울함이 본격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게 만든 것은 타가미가 에노키의 머리카락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희롱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부터였다.

그녀는 모두에게 다정하다. 특무실의 동료들은 물론, 길 가는 행인이나 망자에게마저도 상냥한 것이 에노키다. 그러니까 아마 자신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은 곁에 다가가기조차 망설여지는데, 타가미는 모든 걸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고 그녀에게 쉽게 손을 뻗는다. 사에키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이 차이였다. 누군가는 가능하고 누군가는 불가능 하다는, 너무나도 알기 쉬운 차이.

 

“잠깐, 타가미! 아파요.”

 

저 멀리 복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또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아, 오늘은 망토를 잡아당겼나. 희미하게 보이는 그녀는 타가미의 앞에서 망토를 다시 여미고 있었다. 타가미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사에키는 입으로 성경 구절을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타가미가 어떤 짓궂은 장난을 쳐도 에노키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약간 토라지거나 입술을 삐죽이는 일은 있었지만, 결국 그것도 찰나의 반응일 뿐. 마지막엔 결국 그를 향해 웃어주는 에노키를 보며 사에키는 부조리한 박탈감까지 느끼곤 했다. ‘내가 저런 장난을 쳐도 에노키는 웃어줄까?’ 웃기지도 않는 질문이었다. 그녀가 제게만 쌀쌀맞게 구는 것도 아닌데. 단지, 타가미에게 조금 더 상냥할 뿐인데 저런 생각을 하다니.

 

‘왜 지식이랑 감정은 연동 되질 않는 걸까?’

 

바보 같은 것으로 질투하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누군가를 미워한다. 제가 하는 짓은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멈출 우울함이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오진 않았겠지. 사에키는 그렇게 질투를 향해 맞서 싸우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좋아하고, 그 때문에 가장 그녀에게 간단히 다가가는 타가미를 미워한다. 인정하고 나니 제 온몸엔 구멍이 났지만, 쏟아지는 잠과 두통은 확 줄어들었다.

 

“사에키.”

“…!”

 

빈 구멍을 문장으로 채우던 그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걸까. 에노키는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상냥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부신 미소. 사에키는 입가에서 흘러내리던 문장을 냅다 삼켰다.

신의 말도, 제 사랑 앞에선 신성을 잃는다.

온 몸을 막았던 문장들이 힘없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사에키는 몸의 중심을 잃고 잠깐 휘청거렸다.

 

“뭐 하고 있었어요? 세 번이나 불렀는데!”

“…아, 미안해. 무슨 일이야?”

“오늘 같이 임무 나가잖아요! 슬슬 준비해야 할 거 같아서 불렀어요.”

 

그런 거였나. 사에키는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말을 걸어온 이유가 사적인 것이 아니란 점은 실망스럽지만, 덕분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질투는 잠잠해졌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음, 그럼 언제 나갈까?”

“한 10분 뒤 어때요? 나, 1층에서 기다릴게요!”

“응. 알았어. 조금 뒤에 보자.”

 

오늘 임무는 단 둘이서만 가는 거니 타가미와 붙어있는 꼴은 안 봐도 된다. 다른 동료들도 없으니, 이 고뇌는 곧 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잠을 잘 것이다. 비록 나중에 다시 깨어날 걸 안다고 해도, 그 때를 걱정하느라 지금 찾아온 평화를 즐기지 못하면 손해지. 사에키는 길게 심호흡하고 임무 준비를 하기 위해 마츠모토의 방으로 향했다.

 

“마츠모토, 붕대를….”

“우왓.”

 

노크도 없이 들어와서인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던 마츠모토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달그락. 책상 위에 놓인 약품들과 램프가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훅 끼쳐오는 열기. 붉게 달궈진 바늘. 낮선 쇠의 냄새.

알코올램프를 급하게 끄며 바늘을 내려놓은 마츠모토는 자신만큼 놀란 사에키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미, 미안. 집중하고 있느라. 붕대 때문에 온 거지?”

“응. 괜찮아?”

“아아…. 응. 괜찮아. 바늘 좀 소독하느라….”

 

그냥 소독할 거라면 약품으로 해도 될 텐데. 잘못해서 램프가 쓰러졌다간 불이라도 날 뻔 했다. 마츠모토가 챙겨주는 붕대와 약을 받은 사에키는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마츠모토의 손이 문득 무시무시하게 느껴져 슬쩍 입을 열었다.

 

“꼭 불로 소독했어야 하는 거야? 할 거라면 좀 더 안전한 방법도 있을 텐데.”

“으음…. 아무래도 이게 제일 마음 놓이니까. 그리고 뭔가…, 불길이 스쳐지나간 후 나는 쇠 냄새는 청결하게 느껴져서 좋다고 할까.”

“흐음.”

 

다른 건 모르겠지만 맨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 공감이 간다. 알코올 냄새와 천 심지가 타는 냄새 사이,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쇠의 냄새는 깨끗하고 강렬했으니까. 지금은 바늘이 식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금방 잊힐 냄새는 아니었지.

 

“…뭐, 아무 일도 없으니 다행이지만. 그럼 난 갈게.”

“아, 으응. 일, 조심해서 다녀와.”

 

마츠모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지만 상대방은 그걸 들을 수 없었다. 침묵한 채 에노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사에키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깥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으니까. ‘제 마음도 불속에 던져버리면 예전처럼 깨끗해 질 수 있을까.’ ‘심장을 꺼내 소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시답잖은 생각으로 잠잠해진 우울을 휘저은 그는 코끝에 신기루처럼 남아있는 뜨거운 쇠의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삐그덕. 낡은 나무 바닥이 발걸음에 맞춰 신음한다.

사에키는 먼지가 나풀거리는 낡은 저택 안을 느릿느릿 돌아다니다가 2층 거실에서 멈춰 섰다. 망자는 어디 숨은 건지 보이지 않는다. 이미 도망간 거라면 큰일일 텐데. 긴 한숨에 먼지들이 피어올랐다. 들고 있던 가스등을 내려놓은 그는 어찌해야 좋은가 고민하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어둠속에서, 빛이 없이도 선명하게 보이는 그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에노키, 찾았어?”

“아니요…. 음. 역시 도망간 게 아닐까?”

“곤란하게 되었네. 일단 특무실로 돌아가야 하려나.”

“으음…. 일단 그럴까요?”

 

고민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자, 또 허공에 먼지가 일었다. ‘아아, 털어주고 싶어.’ 사에키는 제 멋대로 올라가려는 손을 이성으로 꾹 억눌렀다.

아마 자신의 꼴도 말이 아니긴 하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 돌아오다니. 그는 주변 가득한 먼지를 보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돌아가서 곧바로 씻으면 괜찮긴 하겠지만, 그 동안 먼지투성이 에노키를 보고 있는 건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제가 친애하는 그녀가 어떤 의미로든 더러워지는 게 싫었다. 무언가 묻어 있으면, 털어주고 닦아주고 싶어져 견딜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먼지라던가, 오물이라던가, 혹은 질 나쁜 동료 같은 것 까지도…

이럴 줄 알았다면 혼자서 찾을 걸 그랬다. 그는 먼지로 얼룩진 서로를 보며 문득 아까 전 맡았던 쇠의 냄새를 떠올렸다.

먼지는 털어내면 그만이지 불로 소독할 건 없지만, 불에 다 태워버리면 더 깨끗해지려나?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대리석 조각 같은 고운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일단 나가자. 여긴 먼지가 너무 많네.”

“그러게요. 사에키, 먼지투성이에요!”

“에노키도 만만치 않은걸? 나가서 털자.”

“응! 그리고 롯카쿠 씨에게….”

 

명랑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가던 에노키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말을 끊었다. ‘에노키?’ 사에키는 제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싶어 상대를 불렀지만, 원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들고 있던 낫을 사에키의 뒤쪽으로 던졌고, 동시에 구석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

 

뭔가 있었나. 낮선 기척을 그제야 눈치 챈 사에키는 그녀를 돕기 위해 리볼버를 꺼냈다.

에노키의 낫을 맞은 이매망량은 아직 움직일 수 있는 건지 검은 피를 토해내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재빠른 움직임이지만, 큰 위협거리는 아니다. 그는 거리가 적당히 가까워지자마자 방해꾼을 향해 총구를 당겼다.

‘끼에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에 총알이 박힌 망량이 바닥을 굴렀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아차!’

 

사에키는 무엇이 깨진 소리인지 살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제가 놔두었던 휴대용 가스등. 그게 넘어지며 망가진 거겠지. 그는 타오르는 나무 바닥을 보고 에노키의 손을 잡았다. 이 낡은 집은 불에 타기엔 너무나도 적합해서, 얼른 나가지 않으면 화상을 입거나 질식할게 분명했다.

 

“에노키, 빨리!”

“아, 응…!”

 

에노키는 그 위험을 잘 아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얌전히 그를 따라 달렸다.

순식간에 번지는 불. 불꽃을 싣고 흩날리는 먼지들. 빛이라곤 없는 낡은 집이, 열기와 빛으로 차오른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나 복도를 달리던 사에키는 반쯤 열린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우당탕. 넘어질 듯 급하게 뛰어나온 두 사람은 무사히 불길에서 빠져나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 위험할 뻔 했네.”

“그러게요…. 콜록!”

“아, 괜찮아?”

 

매연을 많이 마신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린 사에키의 손이 에노키를 향하다 멈추었다.

달빛 아래에서 다시 본 그녀는 온 몸이 회색빛으로 뒤덮여있었다.

이렇게 까지 먼지투성이였나? 사에키는 경악했다. 어두운 곳에서 봤을 땐 분명 이렇지 않았는데. 혹시, 탈출하면서 더 심해진 건가? 그렇다 해도 이건 심하다. 정말. 손으로 터는 정도로 사라질 먼지의 양이 아니다.

 

“…사에키?”

 

어딘가 이상한 사에키의 반응에 에노키가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몸에 난 수많은 구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달빛도 집어삼킬 것 같이 빛나는 제 그녀가 어쩌다 이렇게 지저분해진 걸까. 며칠 전 앞뜰에서 보았을 때는, 그리도 어여뻤는데. ‘설마, 타가미가 없어서?’ 문득 든 생각에 사에키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혹시 제 눈이 잘못된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좋을 텐데. 그런 생각에 두 눈을 아플 때 까지 비벼 봐도 보이는 것은 똑같았다. 잠깐 잊고 있었던 우울함이, 불길이 되어 그의 마음을 장작삼아 타올랐다.

 

“사에키, 표정이….”

 

상냥한 말은 거기까지였다. 사에키에게 다가가며 묻던 에노키는, 하려던 말을 다 내뱉지도 못하고 불길 속에 던져졌으니까.

온 몸이 질투로 불타는 사에키는 먼지투성이 그녀를 자신들이 빠져나왔던 집으로 밀어버렸다. 1층도, 2층도, 내벽도 외벽도 불타는 저택으로 에노키를 떠민 그는 재빨리 불타는 문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사에키, 사에키!’ 몇 번 들리던 외침은 거세지는 불길에 금방 사라졌다.

아아, 눈부시다. 화상을 입은 손이 아프지도 않은지 멍한 표정으로 서있던 그는, 커다란 불길 앞에서 천천히 무릎 꿇었다.

저택을 태우는 불이 꺼지고, 제 마음에 붙은 불도 때쯤엔 그녀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새까만 잿더미 속에서, 다시 아름다운 빛을 두르고 태어나는 자신의 별. 마치 신화 같은 이야기다. 그는 습관적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성경 구절을 중얼거렸다. 마치 신의 부활을 비는, 독실한 신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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